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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30. 2020

스치고 지나간 인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약국


후드득!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늦은 오후 컴퓨터 창을 닫고 내다본 바깥은 어느새 비에 흠뻑 젖어 있다. 무더위로 타들어가던 초목에게 축제 같은 비다. 세차게 내린 비가 더위를 몰고 가버린 탓에 서늘한 기운이 집안으로 스며든다. 창문을 닫고 겉옷을 걸치며 나는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본다.


"그곳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되면 전화할게."

그런 전화를 받으면 나는 2주나 한 달 내 연락이 올 줄 안다.


“우리 언제 밥 한 번 먹자.” 만날 때마다 말하는 친구처럼 그냥 인사로 하는 말이었구나, 생각할 즈음 연락이 왔다. "내일 시간 되니?"


그는 나랑 이십 대 초반을 함께 보낸 대학 서클 친구다. 내가 결혼할 무렵 연락이 끊겼고, 다시 만난 건 십 년 전이다. 그 후 일 년에 한두 번 친구들과 함께 만났다.


그는 뜬금없이 친구의 옛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아내와 헤어진 남자는 한국에 들어오자 수소문 끝에 옛 여자를 찾았다.

여자는 남편을 사별하고 홀몸이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극적으로 만나 여직 잘 살고 있다 한다면 아무런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겠지.





여자는 원하는 게 많았고, 남자는 여자의 욕망을 채워주지 못했다. 남자가 삼십 년 가까이 품고 있던 사랑이 깨지는 데는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차라리 다시 만나지 않았더라면…."

남자는 후회했다.


“아사꼬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도「인연」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만남과 헤어짐. 맺어지진 못했지만 좋은 추억을 남긴 인연이라면 떠오르는 소설 속의 인물들이 있다. 앤드류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 헤더는 지도교수 로버트에게 끌린다.


오래지 않아 나는 어느새 긴장을 풀고 … 그에게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로버트도 마찬가지로 보인다.

그 테이프를 들으면서 로버트는 그 많던 급우들이 어쩌다 연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 자기를 비롯한 일단의 급우들은 어쩌다 교단에 서게 되었고, 나머지는 어쩌다 정부 부처에서 일을 하거나 재무 분야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설명했다. …

“맞아요. 그런 것 같군요.”
그가 힘없이 미소를 지었다. 순간, 좁은 아파트의 의미한 불빛에서 그는 더 이상 세미나에서 자신감이 넘치던 강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조금 외로운 노인처럼 보였다. … 나는 불현듯 다가온 그 저녁의 어색함을 피하고 싶어 졌다.  


망설이던 헤더는 서서히 로버트에게 빠져든다. 연인 사이가 된 콜린을 속이면서까지. 헤더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로버트에게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헤더는 콜린과 결혼한다. 로버트와 헤어짐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스스로에게 설명할 수조차 없었던 감정처럼. 마지막으로 찾아간 날, 만일 로버트가 집에 있었더라면 헤더의 삶은 달라졌을까?

잠든 콜린의 모습을 바라보며 헤더가 생각하는 장면이 앞에 나온다. 그와 함께 가정을 일구고 그의 곁에서 늙어갈 수 있으리란 것, 그와 함께라면 그런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리란 것, 불행하지 않을 수 있으리란 것을 헤더는 알았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단편「약국」에서 헨리는 스물두 살로 갓 대학을 졸업한 데니스 시보드를 여직원으로 고용한다.


헨리의 아내 올리브가 말한다.

“생긴 게 꼭 생쥐야.”
“하지만 귀여운 생쥐잖아.”
헨리가 대꾸했다. "귀여운 생쥐."


데니스의 남편도 이름이 헨리였다.


헨리가 젊은 사내에게 롤빵이 담긴 바구니를 건네며 말했다. “그리고 날 헨리라 부르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이름도 없거든.” 헨리가 덧붙였다. 데니스가 조용히 웃었다. 헨리는 데니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데니스의 남편 헨리 시보드가 죽는다. 어느 토요일, 총기 오발 사고로.


평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바닷가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며 사랑과 상실을 겪는다.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삶의 비밀이 있다. 지켜보는 독자의 눈에는 보이는.

그것은 단순하지만 복잡하고, 치졸하고 유치하지만 순박하다. 


헤더는 기숙사 방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콜린이 언젠가 결혼할 남자가 될 것이고, 이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미망인 데니스를 애틋하게 돌보며 헨리는 데니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낀다.「약국」


작가는 평범해 보이는 삶에도 일상을 뒤집어 엎는 회오리 바람과 고통이 숨어 있으며 그것을 견뎌내는 게, 그 터널을 통과하는 게 인생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몇 년 후 샌드위치를 흘리며 먹던 고등학생 제리 메카시가 대학을 졸업하자, 데니스는 그와  결혼한다. ‘사랑을 담아’ 해마다 데니스가 보내는 카드를 받으며 헨리는 행복해한다. 누구나 인생의 어느 시기에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할 수 있다. 그 시기를 잘 견디어냈다며, 작가는 그들의 어깨를 토닥인다.


요사이는 문득 로버트를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나는 간신히 그에 대한 기억을 나의 가장 고통스럽고 내밀한 상실들이 저장되어 있는 마음 한쪽에 놓아둘 수 있게 되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인연들이 떠오른 건 더위를 시원하게 밀어낸 장마 비 탓이다. 뜬금없이 찾아와 친구에게 친구의 옛사랑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 때문이다. 아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이문세의 노래 때문인지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 따라 떠나가지만




#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앤드루 포터, 김이선 옮김, 문학동네

#「약국」『올리브 키터리지』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권상미 옮김,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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