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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0. 2020

모과 향기 풍기던 길

향기의 근원은 모과나무가 아니라 그 둥지였다



그해 가을. 점심을 먹고 걸어 나온 골목은 모과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날씨만으로 축복이고 선물인 날, 느슨하고 한가한 오후였다.


길은 온통 샛노란 모과로 가득 차 있었다. 향기는 시고 달콤하고 은밀하면서 농후해 아무리 머릿속이 복잡한 일로 가득 찬 사람일지라도 향기의 시작점을 찾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게 했다.


향기는 모과를 키운 햇빛과 바람, 달과 별, 나무를 떠올리게 했다. 분홍 꽃과 여린 가시, 떨어지는 빗물, 풀썩이던 숨의 떨림까지도. 충분히 자란 뒤의 조밀한 과육과 시간이 지나 배어 나온 진액까지 냄새는 실어 날랐다. 이리 오렴, 유혹하듯이.




향기가 가리키는 길을 나는 따라갔다. 산이라기엔 낮고, 언덕이라기엔 높은 경사진 길을 숨차 하며 올라가자 향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위쪽은 의외로 평지였다.

껑충하니 키 큰 모과나무 한 그루가 낡은 집 앞에 서 있었다. 잎을 모두 떨어뜨린 나무는 하늘을 향해 마른 가지를 뻗쳤다, 높은 곳에 나란히 모과 몇 알을 매단 채. 나무는 마치 가시 왕관을 쓴 것 같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을 떠받치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는지 모른다. 홍시면 까치밥이라도 하련만.

나는 손닿지 않는 모과를 그림처럼 바라보다가 한 바퀴 나무 둘레를 돌았다. 빛바랜 군복 같은 보굿은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져 나갈 것만 같다. 짙은 향기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거름도 약도 먹어 본 적 없어 보였다. 나무는 집처럼 나이 들었다.


대문은 무겁게 닫혀 있다. 누가 살고 있기는 한 걸까. 시멘트 블록으로 쌓은 담장은 낡아서 군데군데 비틀거렸고 슬레이트 지붕은 빗물받이 위로 미끄러져 내릴 것만 같다. 주위는 인적 없이 조용했고 야트막한 산과 묘지 몇 구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탈길을 내려오는데 희미하게 사라지던 모과 향기가 다시 살아났다. 퐁, 향수병 뚜껑을 열어젖힐 때처럼. 길은 가장자리 수풀을 향해 비스듬히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무는 알지 못했으리라. 모과가 저희끼리 둥지를 만든 것을.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모과가 내려오는 길에 보였다. 가지가 힘겹게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펼치자, 모과는 내리막을 데굴데굴 굴러 길섶 너머 수풀에 떨어졌다. 그곳에 하나, 둘 모인 모과는 똬리를 틀었다. 매끄럽고 잘난 녀석, 울퉁불퉁하고 못난 녀석, 크고 작고 멀쩡하고 상한 모과가 둥지 안에서 깊고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향기의 근원은 모과나무가 아니라 그 둥지였다.


모과 향이 가장 진할 때는 열매가 맺혔을 때도, 매달려 익을 때도 아니다. 충분히 익은 모과가 어느 날 내려다보던 풀숲에 떨어져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고르고, 그리고 한참을 지났을 때 가장 진하다. 그 무렵의 모과는 샛노란 황금색이며, 만지면 송진 같은 액이 손에 묻는다. 감미로운 추억은 수시로 떠오르듯 한 번 맡은 그 향기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둥지에서 주워 온 모과는 우리 집 식탁에서 온몸이 갈색으로 멍들 때까지 진액을 내뿜었다. 집은 향기로 가득 찼다. 울퉁불퉁 머슴같이 생긴 모과 하나가 가을을 풍요롭게 했다. 모든 절정은 스러지는 것 온전한 아름다움도 끝이 있다. 모과는 썩어가고 가을도 시들었다.




다음 해 그 길을 다시 지나갈 때 모과 향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유난스레 더운 여름을 지낸 후여서 모과는 이미 여물어 버렸는지 모른다. 아니, 제대로 익지 않고 떨어져 향기조차 남기지 못했나 보다.


나는 나무를 보러 언덕을 올라갔다. 집은 그대로였지만 나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히 여긴데, 이 자리가 맞는데, 풀밭을 발로 쓸어봤다. 제법 큰 나무라 잘랐으면 둥치라도 남아있을 텐데 어디에도 나무는 흔적조차 없었다.

 언덕 위에는 여전히 무덤 몇 개가 나란히 있었다. 혹시 시야를 가린다고 베어버린 건 아닐까. 조금만 불편해도⋯ 야박한 세상이니까. 돌보지 못하는 나무이니 지켜보는 것도 힘들었으리라.


언덕을 내려오며 나는 파란 하늘 아래 잎 하나 달지 않고 꿋꿋이 서 있던 모과나무를 떠올렸다. 그리고 골목을 가득 채웠던 모과 향기도.

향기로 그 길은 특별했고, 향기로 그 길은 샛노란 가을이었다. 그것은 진득한 그리움으로 가슴 한쪽을 아리게 했다. 나무를 자르니 향기가 사라졌다. 길은 평범했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수필과 비평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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