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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n 20. 2020

지금에야 돌아보는 엉망진창 살림 분투기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인 줄 알고



얼마 전에 손자들이 왔을 때 『숀 아저씨의 엉망진창 하루』라는 동화책을 읽어줬다. 바깥에서 농사일을 하던 남편이 편해 보이는 집안일을 하겠다고 나서다 혼나는 이야기인데,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무척 재미있어했다.


그러고 보면 살림이나 육아는 잘하면 당연한 거고 조금 게을리하면 금방 혹은 후일 표시가 나니 노력에 비해 결실을 인정받기는 지난한 일들인 것 같다.


결혼 후 시댁과 친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아온 나는 살림에 관한 한 소 뒷걸음질 치듯 두서없을 때가 많았다. 지금에야 돌아보니 깔끔하게 빨래를 잘 개키거나 맛깔스러운 반찬을 만드는, 살림의 내공이 엿보이는 사람들은 한두 해 시집살이한 경우가 제법 많은 것 같다. 시집살이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먹어보고 어깨너머로 본 기억으로 된장찌개도 끓이고 김치도 담갔다.




어떤 음식을 만들 것인지,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은 본인이 먹고 싶어서라는 걸 사람들은 알까?

이건 요리하는 사람들의 비밀이다. 먹고 싶으면 만들게 된다.


추위가 가시고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면 향긋한 미나리, 냉이, 쑥 향기가 코에 아른하다. 미나리 무침, 냉이 넣은 된장찌개, 쑥국. 소쿠리에 담긴 봄나물을 지나치지 못한다. 길가의 과일 가게에 딸기가 지천이면 달큰한 딸기잼 졸이는 냄새를 온 집에 풍기고 싶고. 더위에 지쳐 입맛 없는 여름에는 매콤한 비빔 국수가 제 격이다. 임신한 여자만 그러란 법 없지.





“장 안 뺀 된장이 맛있어.”

 결혼 한 이듬해인가, 엄마가 하던 말이 귀에 어른거려 결국 메주를 샀다. 


장 담그는 게 뭐 별 거 겠어? 소금물에 메주 넣으면 되는 거지. 겁 없이 큰 독 -후일 버리려 할 때 아랫집 할머니가 냉큼 가져가 은근히 아쉬웠던 -에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었다.



 ‘샤’라 불리는 하얀 천을 구해서 독을 덮고 고무줄로 동여매 볕 잘 드는 베란다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열심히 뚜껑을 여닫았다. 베란다 새시가 없어서 오전이면 거실 안쪽까지 빛이 깊이 스며 들어왔다.


햇볕을 쬐는 만큼 장이 맛있다는데. 아기를 돌보는 중에도 노랗게 익은 된장을 떠올리며 열심히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뚜껑을 여닫았다. 마침내 달력에 동그라미 가 표시된 날. 조심스레 천을 벗겼다. 비명을 듣고 남편이 달려왔다.


“아이고, 그렇게 구멍 숭숭한 천으로 덮었으니 얘들이 엄청 좋아했겠네.”

옆집 아주머니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약 올랐지만, 실제로 그랬다. 벌레라면 십 리 밖으로 도망가는 나 아닌가! 뒤치다꺼리하는 남편 뒤에서 나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된장 독은 비닐로 꽁꽁 싸매 벌레가 슬지 않게 하고 빛을 잘 받게 유리 뚜껑을 덮어야 한다. 반 이상을 걷어 버리고 남긴 아랫부분 된장은 노르스름했고 풍미가 좋았다. 지금도 그 맛을 잊지 못한다.

부르르 떨었던 기억 때문에 한동안 장 담글 생각을 접었다가 몇 년 후 용기를 내어 다시 담았지만, 예전의 맛은 나지 않았다. 뭐든 처음 만든 게 맛있었다.




시댁 차례상에는 메밀묵이 빠지지 않는다. 어머님이 메밀가루를 베 보자기에 담아 주며 물에 치대어 씻으라 했다. 보자기를 주무르니 물이 쌀뜨물처럼 우러났다. 물을 서너 번 갈아가며 열심히 주물러 씻었다.

“언제까지 씻어요?”

 

메밀묵은 메밀을 치대어 우러난 물을 모아서 풀처럼 죽을 쑤어야 한다. 그걸 다 씻어 떠내려 보냈으니….

 

처음 해 보는 것들은 늘 그렇게 낯설었다.


친정에서 제사 음식을 준비할 때 불린 녹두를 믹서기에 가는 게 내 역할이었다. 녹두전이라면 늘 봐왔기에 자신 있었다.

결혼 후 첫제사에 서울에서 시숙이 왔다. 제사를 마치고 음복할 시간. 시숙이 녹두전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싹! 내 어깨가 움찔했다. 이빨이 시렸다. 숙은 표정 없이 돌 섞인 전을 꿀꺽 삼켰다. 


녹두전을 준비할  먼저 녹두를 살펴야 한다. 조심스레 일어서 혹시 있을지 모를 잔돌을 골라내야 한다. 돌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을 건너뛰면 음식을 망친다.


지금은 모두 갈아놓은 고춧가루를 사지만. 예전엔 말린 고추를 사서 일일이 젖은 천으로 닦았다. 고추에 약을 많이 친대서.

가을이면 고추 닦는 게 마음먹고 날 잡아해야 할 큰 일이었다. 열 근 스무 근 앉아서 닦노라면 허리와 어깨가 빠지도록 아팠다. 예전에 엄마는 가을마다 고추를 백 근씩 닦았다는데.  


그러다 고추를 직접 말려서 가루를 만들고 싶어 졌다. 장에서 산 고추를 아파트 옥상에 널어놓고 비가 오려나, 아기가 깨려나, 조바심치며 엘리베이터도 없는 4층 계단을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렸다.


널고 걷기를 반복하며 말린 고추는 너무 말라 빻을 수도 없게 되었다.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서 물 고추와 마른 고추를 구별하지 못했다. 고춧가루보다 고추 널린 풍경을 더 좋아했는지 모른다.




어깨너머로 보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늘 보고 싶은 것만 보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자라서 집을 떠났다. 부부만 남은 집.

시간 여유는 많아졌지만 전보다 살림을 열심히 하지 하지 않는다. 아침에는 간단하게 빵을 먹고, 된장도 사고 간장도 사고 메밀묵도 산다. 고추를 사서 빻지도 않고, 김치도 절인 배추를 사서 담는다. 가끔 김치를 사 먹기도 한다.







#숀 아저씨의 엉망진창 하루』글: 애릭 매던, 그림 : 폴 헤스, 옮김: 김재원, 통 큰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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