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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05. 2020

형과 아우

태어나는 순간부터 라이벌


간밤에 오 년 전 상영된 영화를 봤다.


큰 기대 없이 본 영화인데 배우의 호연 탓인지 영상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96년 미국의 억만장자 존 듀폰이 미국의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살해한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폭스 캐쳐>인데, 나는 듀폰의 살인 심리보다는 슐츠 형제에게 더 관심이 갔다.  


형과 동생이 같은 레슬링 선수다. 국가 챔피언이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말없는 동생은 어딘지 태도가 불퉁스러워 보인다. 그런 동생을 형은 말없이 지켜본다. 형은 온화한 성품으로 사람들과 소통도 잘한다. 어디서나 인정받는다. 동생이 두 살 때 부모가 이혼했으니, 형이 키운 셈이다. 아버지 같은 형.




나는 형제가 레슬링 연습하는 첫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가선 형은 먼저 동생의 양 어깨를 자기의 어깨로 부딪치며 문질러 풀어준다. 갑작스러운 훈련으로 관절과 근육,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마치 마사지하듯이 팔뚝과 허벅지를 세심하게 두들겨 주고 시합을 시작한다.

훈련 파트너이자 코치인 형에게 동생의 공격은 가차 없다. 목을 꺾고 얼굴을 매트에 깔아뭉갠다. 코피가 터지자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얼른 돌아서서 옷에 문지르고 시합을 계속한다. 결국 동생은 형에게 깔린다. 동생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통증 때문에? 진 게 억울해서? 몸의 언어, 침묵의 대화.

영화 전편에 음악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형제간의 애증이 드러나는 레슬링 시합이 화면 바깥으로 진한 땀 냄새를 풍겼다.




오랜만에 다섯 살, 여섯 살, 손자 두 녀석을 가까이 두고 보니 둘 사이에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놀이터에만 가면 작은 녀석은 빨간 그네에 집착했다. 그걸 눈치챈 형은 재빨리 달려가 그네를 선점해버린다. 작은 녀석은 그네 줄을 붙들고 자기 거라고 울고불고. 차츰 작은 녀석은 미끄럼틀도 시소도 타지 못했다. 형에게 그네를 빼앗길까 봐.

둘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려고 나는 당근과 채찍을 교대로 내밀었지만, 차츰 지쳐서 놀이터 가는 게 즐겁지 않았다.


“할머니, 전 형이 없으면 좋겠어요. 전 여기서 살래요.”

작은 녀석이 내게 다가와 심각하게 말했다.

어릴 적 자기를 키워준 나를 녀석은 최고의 우군으로 여긴 거다

2년 전 녀석은 서울에 올라가 엄마와 아빠, 형을 만났다.

한 살 위 형은 힘도 세고, 뭐든지 잘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려하면 바로 빼앗는다. 내 물건은 아무것도 없다. 엄마 아빠마저 형 편만 든다.


딸 네 집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둘이 싸우면 한두 번 타이르다가 나중엔 무조건 장난감을 빼앗아 손 닿지 않는 곳으로 올려놓았다. 어느 편을 들 수도 없었고, 설명해도 아이들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틀이 지나자 큰 녀석이 스트레스를 받는지 내게 다가와 “할머니 언제 갈 거예요?” 묻기 시작했다.




마크는 형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데이브!” “데이브!”

모두 잘난 형만 찾으니 설 자리가 없다. 스트레스가 심해 얼굴을 때리며 자해도 한다.

그때 를 알아주는 사람이 다가온다. 조건도 좋다. 물론 그도 처음엔 형을 데려오려 했다. 다행히 형은 관심이 없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혼자 일어설 수 있는 시간이. 그런데.


마크는 아직 부족하다. 쉽게 무너진다.


낌새를 눈치채고 데이브가 마크를 찾아온다.


역시 형은 대단하다. 뒤엉킨 상황을 눈치채고 재빨리 정리한다. 나를 혼내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다시 형에게서 떠나고 싶다.




박물관에 갔을 때 큰 녀석이 갑자기 화장실이 급하다고 다리를 꼬았다.

둘 다 데리고 가야 하는데 구경에 눈이 팔린 작은 녀석이 안 가겠다고 떼를 썼다. 주위를 둘러봐도 도움 청할 데가 없어 나는 작은 녀석에게 꼼짝 말고 이곳에 있으라 다짐하고 계단 건너편 화장실을 빨리 다녀오기로 마음먹었다.


서둘러 다녀오니 작은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간이 쿵 떨어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나지막하게 일이 층이 벽 없이 연결된 공간이다. 큰 녀석 손을 잡고 정신없이 일 층을 헤매고 다녀도 작은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이 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다급하게 가려는데, 큰 녀석이 갑자기 귀를 쫑긋했다.


“이건 내 동생 발자국 소린데?”   

순식간에 녀석은 내 손을 뿌리치고 왼쪽으로 달려가더니 잠시 후 동생 손을 잡고 둘이서 사이좋게 걸어왔다. 작은 녀석은 우릴 찾지도 않았는지 태평스러운 표정이었다.


녀석들 귀에만 들리는 뭐가 있는 걸까?


할머니가 초조해 하자, 위기가 닥치자 형은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여섯 살인데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 형제라지 않은가.

'형만 한 아우가 없다'는 말도 있고, '형을 보니 아우'란 말도 있다. 부모는 의식치 못하고 형제를 비교해가며 키운다. 먼저 태어나서 득 보는 것도 있고, 손해 보는 것도 있는데.


88년 서울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전. 마크 슐츠 선수가 경기하는 장면을 나는 찾아봤다. 그는 대단히 훌륭한 선수였다. 결코 누구 그늘에 묻힐 사람이 아니었다.  형 데이브와 비교만 하지 않는다면.



# 영화 <폭스 캐처>(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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