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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04. 2020

인생

잊지 않으면 살아있는 거야


그때 나의 이름은 새댁이었다.


결혼 후 직장 사택에 들어가 살았는데 옆집, 윗집에 사는 이들은 남편의 직장 상사이거나 학교 선배였다. 부인들은 나보다 서너 살 위였고, 다들 아이들이 있었다. 일 년 후 나는 딸을 낳았고, 그들과 이 집 저 집 오가며 지내게 되었다. 아기들 나이가 고만고만한 터라 모이면 지네끼리 잘 놀아서 우리는 수다도 떨고 차도 마시며 조금 숨을 쉴 수 있었다.


집집이 공평하게 드나들어야 했는데 그런 철이 안 들어서 다들 편안하게 느끼는 아랫집에서 주로 모이게 되었다. 그 집 신세를 많이 졌다.


우린 아이들이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학교에 입학하면서 차츰 흩어졌다. 이사를 가고 직장을 옮기면서 소식도 끊겼다. 이십 년이 지나자 하나 둘 결혼 소식이 들렸고, 우리는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놀라고 마음이 가라앉았지만 슬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하루가 지나자 나는 누구와 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녀석의 어릴 때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나를 새댁이라 부르던 옆집 엄마가 떠올랐다. 그녀는 몇 번의 이사로 연락처가 사라졌다가 작년에 우리 아파트로 이사와 지나다 얼굴을 보면 반가워하는 사이다.


소식을 전하자, 그녀는 망연자실했다. 전날의 나와 비슷했다.

아마, 하루가 지나면 그녀도 나와 같아지겠지. 갑자기 검은 가스 같은 게 치밀어 올라와 내 목을 틀어막았다. 나는 컥컥하느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떡하니….”

그녀와 내가 떠올린 것은 우리의 옛적 친구이기도 한 녀석의 어머니와 아버지, 일 년 전 결혼식장에서 함박웃음을 웃던 그의 아내였다. 정작 녀석에 대한 생각은 뒷전이었다.


자식은 관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더니.”

명이지 뭐.”

그날 저녁 식탁에 수저를 놓으며 중얼거렸을 때 남편이 퉁명스레 했다.


나는 불현듯 예전에 읽었던 위화의 소설 『인생』 떠올랐다.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었다. 한량처럼 촌구석을 놀러 다니던 주인공과 푸구이 노인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기에 집에 책이 없었다.

나는 책을 주문했고 며칠 후 받았다.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자 남편이 "왜?"물었다.


"그냥. 읽은 건데 다시 산거야."


'그런데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고 싶었지?'

순간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주문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끔찍한 기억은 빨리 잊으려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 하던가.

모든 인간은 자기를 합리화한다지 않았나. 때 이른 건망증에 나는 적지않이 당황했다.




주인 공 '나'는 십 년 전에 한가하게 놀고먹기 좋은 직업을 얻었다. 그것은 촌에 가서 민요를 수집하는 일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참새처럼 매미처럼 시골 들녘에서 빈둥거린다. 밭에서 일하는 남자들과 음탕한 이야기도 노닥거리고 참외밭에서 아이 밴 여자처럼 참외를 많이 먹기도 하고 할머니 뻘 되는 여자가 부르는 노래 '시월의 잉태'를 듣기도 한다. 노상 하품을 하면서 시골 밭둑길을 느릿느릿 걷다가 며느리를 덮치려다 아들에게 들켜 울고 있는 노인을 만나기도 한다. 어느 날은 밤길에 연못가에서 딱 들어붙어있는 두 몸뚱이를 보기도 하고, 속곳 차림으로 생쥐처럼 달아나는 남자를 보기도 한다. 이런 일은 하두 다반사여서 빈틈없이 파릇파릇한 토지를 보면 농작물이 어떻게 그리 왕성하게 자라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길을 가다 소를 끌고 가며 노래 부르는 노인을 만난다.


황제는 나를 불러 사위 삼겠다지만
길이 멀어 안 가려네.  


자신만만한 노인 때문에 웃음이 나왔지만, 노인은 밭을 가느라 지친 소에게 온갖 이름을 붙여서 말하는 게 아닌가.

"얼시! 유칭! 게으름 피워선 안 돼. 자전, 펑샤! 잘하는구나 쿠건! 너도 잘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노인은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말다.


노인은 걸어가면 발에서 동전 짤랑이는 소리가 날만큼 부자인 쉬 씨 집안의 독자 '푸구이'다. 중국 문화 대혁명의 와중에 먹고 마시고 계집질하고 온갖 방탕한 짓을 다했던 난봉꾼. 산더미같이 쌓였던 돈이 발 씻는 물처럼 흘러가버렸다.


여유작작한 생활을 막 시작했던 는 처음 만난 푸구이 노인의 야기에 그전까지 알지 못했던 것들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어갔다.

이후 시골에서 푸구이를 닮은 노인들을 많이 만났지만 푸구이 노인처럼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묘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마치 그렇게 하면 다시 한번 그 삶을 살아보는 것 같았다.




유칭과 얼시, 자전과 펑샤, 쿠건은 푸구이의 죽은 아들과 사위, 아내와 딸, 일곱 살에 죽은 손자이다. 운명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 『인생』의 중국어 판, 제목은 '살아간다는 것(活着)'이다.


아이들에게 녀석의 소식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혹시 기억하니?"

“누군데요?”

대여섯 살 때의 놀이 친구를 아이들은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서른일곱, 반짝이는 눈웃음을 짓던 녀석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말았다. 아이들이 잊어버린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마음이 착잡했다.


“망각은 선물입니다. 모두 기억하면 어떻게 살겠어요.”

어떤 이는 내게 말했지만, 나는 녀석을 잊고 싶지 않았다. 어 먼 곳에서 아이 낳고 오손도손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암, 잊지 않으면 살아있는 거야, 마지막 본 그 모습으로."




#  『인생』 위화 저, 백원담 역, 푸른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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