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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10. 2020

어느덧 7 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작년 12월 나는 수시로 달력을 쳐다봤다.


우체국에서 봉투에 빨간 펜으로 ‘신춘문예 응모’라 적을 때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길에서 친구를 만났을 때는 기대는 안 하는데 너만 알고 있으라며 은근히 자랑도 했다. 당선 소식을 받는 마지막 날이 14일이라 들었다. 하지만 해를 넘기며 새 달력을 걸 때까지 나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새해 첫날 펼쳐 본 신문은 신춘의 열기로 뜨거웠다. 오랜 습작기를 거친 입상자들이 당선의 변을 늘어놓았다. 만일 입상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할까, 턱을 고이고 상상에 빠졌다. 아무래도 글쓰기 공부를 하러 서울 올라간 것부터 이야기해야겠지?




7년 전, 신문에서 글쓰기 강좌 안내를 봤다. 제대로 글쓰기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는 매주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용기를 냈더니 막연하게 바랐던 일이 현실이 됐다. 석 달간 글은 두 편 썼다. 배우는 것도 좋았지만, 글을 쓰려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더 흥미로웠다. 연령층이 생각보다 높았다. 오십 대에서 칠십 대 정도? 글을 써서 메일로 보내고 합평을 하는데, 여자들보다 짙은 감성을 가진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강좌를 마친 가을에는 지역의 문학관에서 수필을 공부했다. 처음 쓴 글은 너무 두서없어서 여러 사람 앞에서 읽기도 민망했다. 나이만 차곡차곡 먹었지 남달리 드러낼 인생 경험도 없는 터라 뭘 써야 할지 답답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 책을 읽어야 했다.

처음 도서관에 간 날이 떠오른다. 서가에 책은 빼곡히 꽂혀 있었지만 읽고 싶은 책도, 뭘 읽어야 할지도 몰랐다. 관심을 가지니 차츰 책이 눈에 들어왔다.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를 만났다. 이윤기의 책을 한 권 읽으니 저자의 다른 책도 읽고 싶었다. 책이 책을 물어다 줬다.

그간 읽은 책은 내 머릿속 어느 구석에 들어 있기도 하고, 흔적 없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제목만, 표지만 기억으로 남은 책도 있다.

책을 읽으니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말이 되어 술술 입 밖으로 나올 때도 있고 잠시 떠올랐다 사라질 때도 있었다. 생각을 글로 옮겼는데 가볍고 억지스러워 읽고 나서 북북 지우기 일쑤였다.


그래도 썼다.





한두 해가 지나자 아무것도 나올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의 방에서 작은 조각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것들을 글로 옮겼다. 화려하고 재기 넘치는 문장도 없고, 심오한 철학적 지혜도 담지 못했다. 글이 소박해서 읽기 쉽다는 말을 칭찬으로 들었다.


"글은 읽기 쉽게 써야 하는 거야."


내게 그 말을 해준 사람은 누구였을까?

3년을 공부하고 수필 전문지에 수필 작가로 등단했다. 하지만 공모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글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글쓰기 신인일 뿐이었다. 얼마 후 수필반을 그만두게 되자 나는 다시 집에서 주야장천 책을 읽었다.




다음 해 봄, 친구가 문화센터의 소설창작반을 소개해줬다.

등록 시기를 놓쳐서 교실 맨 뒷자리에 앉아 듣기만 했다. 이곳은 수필반과 달리 연령층이 젊었다. 이십 대에서 육십 대까지. 내가 가장 나이 많아 보였다. 어떻게 소통할까 고민했지만 관심분야가 같아서 나이가 벽이 되진 않았다. 소설을 읽고 내용을 분석하는 수업이었는데, 덕분에 책을 고르는 시야가 많이 넓어졌다. 이전 같으면 읽지 않았을 젊은 작가들의 책과 퀴어 소설, 현대 영미 단편 같은 책들을 읽게 됐다.


오래전 얇은 책 한 권을 읽은 적이 있다. 아마,  중고등학교 무렵일 것 같다. 열 편 정도의 단편이 실린 작은 책인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반전이 놀라웠다. 단편 소설의 매력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후일 스릴러, SF, 환상 소설, 온갖 책을 뒤적였지만, 나는 그 책을 찾지 못했다.


감히, 그런 단편을 써보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여름 학기에 문화센터의 정식 수강생이 된 나는 드디어 첫 단편을 쓰게 됐다. 최소한 A4용지로 아홉 장은 써야 한다. 일만 자 이상. 쓸 수 있을까? 그간 쓴 수필 중 비슷한 글감의 글 서너 편을 모아 짜깁기한 게 나의 첫 단편이 되었다. 치매로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한 여자의 젊은 시기를 글로 되살리고 싶었다. 수필보다 흐름이 긴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가을이 되자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에 교실이  들썩였다. 이곳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학생, 교사, 주부, 간호사, 전기기사, 퇴직한 연구원. 저마다 공모전 당선을 꿈꾼다. 이미 여러 번 응모한 사람도 있다. 분위기에 휩쓸려 단편 습작 세 편을 다듬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문을 두들겼다.





공모전에 떨어진 나는 생각지 못한 상황을 맞게 됐다. 글이 쓰기 싫어졌다. 그럴 거라는 말을 수차례 들었지만, 막상 닥치니 씁쓸했다. 쓰고 싶은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


기대하고 낸 글도 아닌데,

첫 작품을 완성시켜보려는 생각이었는데,

낙선을 예상했는데.


생각과 달리 마음 구석에 기대의 작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던 거다.


쓰고 싶은 글감도 떠오르지 않는 막막한 상황이 한 달 넘게 이어졌을 때,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시작됐다. 외출을 못 하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그래, 내겐 수필이 맞아. 어울리지 않게 무슨 소설. 나는 다시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공모전이 눈에 띄어 글을 몇 군데 보냈다.

수필 공모전 발표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그러고 나니 의기소침해서 아무런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뭣 하러 이 고생을 하나 싶었다. 다행히 공모전을 주관한 잡지사에서 원고 청탁이 왔다. 내 글이 활자화된다니! 조금 기운이 되살아났다.



그간 쓴 글을 컴퓨터에 저장해놓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사라지는 글이 생길 것 같아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일 년 전부터 다듬었지만 어쩐지 마음에 걸려서  차일피일 미뤘던 일이다. 독립출판을 목표로 워드로 두 달간 책 편집을 다. 


하지만 책을 만들지 않았다.




요즘은 브런치에 글을 쓴다.


“책 만들어서 뭐하실 건데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실 거예요?”


5월 초, 편집한 파일을 들여다보던 아들의 말은 듣기에 따가웠다. 하지만 어딘지 찜찜했던 내 마음을 드러낸 말이었다.


“차라리 브런치 작가로 나가보실래요?”


고백하자면 이미 나는 4월 말에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가 떨어졌다.

자존심 상해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수필 등단 작가가 떨어지다니. 물론 나는 자기소개에 이런 이력을 넣지 않았다. 우리는 자기를 소개하고 자랑하는데 익숙지 않은 세대다. 어디에서나 겸손할 것을 요구받고 자랐다.

작년 신춘문예 응모할 때도 “괜히 젊은 애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아닐까요?” 말을 꺼냈다가 “걱정 말고 좋은 글이나 쓰세요.” 핀잔만 들었다.


“떨어지면 당연히 다시 도전해야죠.”


젊어서 저럴까? 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는 잘 삐친다. 거부당하는 게 싫고,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알아서 사라진다.

그런데 재도전이라니.


아들이 자기소개를 도와줬고 사흘 후 나는 브런치 작가가 됐다. 두 달간 40편 넘는 글을 올렸고, 내 글을 읽은 이는 어느새 12만 명이 넘었다.


요즘은 거의 하루 한 편씩 글을 쓴다. 글로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부담이 없어서인지, 예전보다 글 쓰는 게 쉽다. 평범한 일상에서 겪은 일을 나는 글로 모은다. 내 글에 달린 댓글에서 새로운 글감을 떠올리기도 하고 글을 쓰는 이유를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공모전에 낼 글을 쓸 때는 여전히 위축된다. 글을 쉽게 쓰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공모전에 글을 낸다는 생각을 마음에서 지우려 한다. 떨어지고 나면 후유증이 너무 크니까. 작년 신춘문예 응모 이후 나는 아직 컴퓨터의 단편 소설 폴더를 열어보지 않았다.


어릴 적 살던 집에 복숭아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약도 치지 않고, 가지를 잘라주지 않아 나무는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했다. 대부분 벌레 먹거나 제대로 여물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래도 나무는 항상 마지막에 잘 익은 복숭아 두어 개를 우리에게 안겨줬다.

큼직한 수밀도를 두 손으로 들고 한 입 덥석 베어 물면  달콤한 물이 입가로 줄줄 흘러내렸다. 이후에 그렇게 맛있는 복숭아를 먹어본 적이 없다. 햇빛과 빗물, 바람을 맞고 무르익은 그 복숭아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돌아보면 글쓰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오늘까지의 과정이 흘러가는 개울물 같다. 돌부리에 부딪히면 하얀 물방울을 튕기고 흐르는 물. 생각하고 있으면 기회가 다가왔고. 꾸준히 하고 있으면 문이 열렸다. 개울물은 어디에 바다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바다에 닿는다. 글을 쓰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던 지난 7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랜만에 소설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 저희랑 소설 스터디 함께 하실래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긴 나는 잠시 후 컴퓨터를 켜고 단편소설 폴더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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