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인 Jul 16. 2020

아들이 천재인 줄 알았다

집에서 조금 신경 쓰셔야겠어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된 해 오월,  담임선생님과 면담이 있었다. 카스텔라 한 통을 사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남달리 똑똑하다고, 은근히 칭찬을 기대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치른 산수 시험지를 선생님이 꺼내놓았는데 아들이 70점을 맞았다. 이전에 별로 시험을 치른 적이 없어서 나는 아들이 90점 정도는 받으리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집에서 조금 신경 쓰셔야겠어요."

선생님은 말했고, 이어서.

반에 말썽꾸러기가 남자애가 셋 있는데, 얘들 때문에 힘들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선생님은 뭔가 쌓인 게 있는 표정으로 지난번에 강가에 개구리 알을 채집하러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찾아도 개구리가 보이지 않아 돌아오려는데, 이 세 녀석이 기어코 보고 와야 한다며 자기들끼리 강 하류 쪽으로 휑하니 가 버렸다 한다. 학급 아이들 때문에 따라가지도 못하고 녀석들 때문에 돌아오지도 못 해서 무척 난감했다는 이야기였다.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몇 번이나 고개를 조아리고 돌아 나왔는데, 누가 봤으면 얼굴이 많이 붉다 했으리라. 

하지만 나의 속마음은 그리 나쁘지 았았다.


내가 아는 녀석들은 짓궂기는 해도, 자기주장이 강하기는 해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유쾌한 개구쟁이였기 때문이다. 개구리알 채집이라! 호기심에 사방으로 뛰어다녔을 녀석들이 떠올라 나는 은근히 즐거워졌다. 하지만 공부를 이 상태로 둬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결심했다.


그까짓 산수!
이다음엔 반드시 100점을 맞으리라.
아니, 100점을 맞히리라!

이 사달이 날 줄 알았으면 학습지를 접는 게 아니었다. 학습지를 그만두게 된 건 누나는 멀쩡하게 견뎌낸(후일 이사 갈 때 피아노 뒤에서 무수히 쏟아져 나오긴 했지만) 학습지의 초보단계 콩알 세기를 녀석이 한 달만에 거부한 거다. 콩알이 아니라 비비탄 총알이 맞겠다, 크기가.


"싫어. 지겨워."
녀석은 빨갛게 흥분한 얼굴로 내게 학습지를 내밀었다.

"왜 콩알만 있어? 토끼도 거북이도 있어야지. 지겹게 왜 같은 것만 세라고 해?"

욕심에 눈이 그리 어두워지기 전이라 나는 녀석의 나름 합리적인 반발에 수긍하고 말았다. 즉시 학습지를 끊었다. 70점은  결과다.



 

이성을 되찾은 나는 그날부터 저녁이면 녀석을 앉혀놓고 수셈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덧셈, 뺄셈.
시키니 제법 잘 따라왔다. 그래서 나는 점점 더 신이나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


이제 네 자릿수 덧셈을 해볼까?
문제지를 들고 방에 들어간 지 십 분이 되지 않아 녀석은 한 바닥을 다 풀어서 갖고 나왔다. 채점해보니, 어? 다 맞다….

순간 나는 아들이 천재인 줄 알았다!

아냐. 아냐.
머리를 흔들었다. 수상해.

 나는 아들을 조용히 불렀다.
"문제 푼 연습장 가지고 와 보실까요?"

"없는데요. 암산했어요."
난, 다시 아들이 천재인가 생각했다. 진짜일지 모른다. 자식을 믿어야지.


하마터면 믿을 뻔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그럼 엄마 앞에서 풀어보렴."
녀석은 손가락을 펼치더니 눈을 위로 치켜떴다가 아래로 내리깔았다가 오른쪽 왼쪽으로 굴리더니 드디어 열 손가락을 모두 펼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열심히 꼬무락거리며 심각하게 진지하게 계산했다. 이따금 암산을 하는 듯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잠시 후 녀석이 말했다.


"답지 보고 했어요."

그날 회초리를 들고 녀석 꽁무니를 따라다닌 건, 명목상으로는 거짓말한 것을 벌주려는 거였지만, 실상은 속아 넘어간 것에 대한 배신감과 사라진 천재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었다. 

사실 화난 표정 짓기가 무척 힘들었다.


녀석은 미꾸라지처럼 도망 다녔다.




당최 손에 잡히지 않아 나는 결국 녀석을 현관 밖으로 쫓아냈다. 현관 모니터로 내다보니 복도 계단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항복하고 들어온 건 옆집 새댁이 지나가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녀석을 쳐다봤기 때문이다. 녀석은 들어와서 엉덩이를 두 맞고 자러 갔다.

25년 전 다.




작가의 이전글 세화, 그 낡음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