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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16. 2020

건지 섬과 다라야

책이 보여주는 세상

  


한두 달이면 그칠 줄 알았다.

체념보다 무서운 게 섣부른 희망이라더니. 바리어스 감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뉴스를 들은 저녁에는 방구석에서 짙은 먹구름이 나직하게 깔려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일상을 다시 짜야했다. 어디에 메인 것 없이 허우적거리다간 아예 일상이 통째 무너질 것 같았다. 무심결에 친구들과 만나려고 약속하다가 움찔했다. 나와, 다른 이의 건강이 바로 연결되니 섣불리 감성적이 될 수 없었다. 나만이라도 집에 있어 비좁은 세상에 바람골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책을 좋아하니, 인연이 닿은 책들을 가능하면 많이 읽기로 마음먹었다.


며칠 전 나는『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읽었다.




2012년부터 시리아의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는 반체제 인사들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시리아 내전의 중심 도시 다라야를 무차별 폭격했다. 총알과 화학 무기, 네이탐 탄이 매일 다라야에 쏟아졌다. 


작가 델핀 미누이는 2015년 SNS에서 우연히 사진 한 장을 봤다. 사진을 실마리로 작가는 다라야에 비밀 도서관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곳에 도서관이 있다니! 작가는 다라야의 실상을 이메일, 스카이프, 왓츠앱으로 듣는다. 


 아흐마드는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겨, 서툰 외국어 실력이지만, 몇 가지 익숙한 단어들을 읽었다. 사실 중요한
것은 책의 주제가 아니었다. 아흐마드의 몸이 떨려왔다. 그의 가슴속 모든 것이 요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
식의 문이 열리는 전율이었다.  

 


다라야 청년들은 봉쇄된 도시의 지하에서 책을 발견하고 주워서 읽게 되었다. 그들은 곳곳에 흩어진 책을 모아서 건물 지하에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들은 마법 같은 책의 힘을 믿으며 책에 의지하게 된다. 책이 영혼의 상처를 싸매는 붕대가 되었다. 하나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졌다. 글의 유익함. 움직이지 않고도 탈출할 수 있게 해주는 신비한 연금술. 시간이 멈췄다. 


 “전쟁은 역효과를 낳았어요. 사람들을 변하게 하고 감정과 슬픔, 두려움을 죽였어요. 전쟁하고 있을 때 사람들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봅니다. 독서는 이러한 기분 대신 살아갈 힘을 줍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것이에요.”  

 

 도서관은 그들의 성소였다. 은밀한 공간. 레이더와 포탄으로부터 안전한 곳. 남녀노소 독자들이 만나는 곳. 독서는 마치 피난처와 같았다. 그들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대신 소박하게 한 걸음씩 진보하며 사고를 풍부하게 만들어 나갔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문득 이전에 본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위치한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다. 독일군은 건지 섬에 연합군 포로수용소를 세운다. 끔찍한 굶주림과 강제노동, 수용소의 참상. 지켜보던 주민들은 서서히 지쳐간다. 독일군이 모든 걸 빼앗아갔다. 식료품, 곡식, 주민들이 키우는 닭과 돼지까지.


모저리 부인이 아기 돼지 한 마리를 숨겨뒀다가 옆집 청년 도지에게 잘 드는 칼 하나를 들고 조용히 찾아오라고 시킨다. 부인은 그간 왕래 없던 이웃들을 초대한다. 사람들은 몰래 담근 술을 가져오고, 파이를 구워 온다. 버터도 밀가루도 없이 감자 껍질로 만든 파이. 모처럼의 흥겨운 파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들이 독일군과 마주쳤다. 저녁 시간이니 통행금지다. 얼결에 핑계 댄다는 게 독서 모임이었다. 모임 이름이 뭐냐고 묻자,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고 떠오르는 대로 말한다.  




건지 섬 주민들은 이 날 이후 본의 아니게 독서 모임을 하게 된다. 책을 좋아하는 독일군이 눈치 없이 참석하는 바람에 술주정뱅이 의사, 돼지치기 청년, 어부, 푼수떼기 처녀가 어색한 독서모임을 시작한다. 하지만 모임은 차츰 체계를 잡아간다. 솔직하게 책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마찰이 있어도 반대 의견을 수용한다. 그들은 책을 읽는 순간만은 현실의 배고픔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른 세상으로 날아 갈 수도,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었다. 


런던에 사는 잘 나가는 작가 줄리엣(릴리 제임스)은 『찰스 램 수필집』을 구하고 싶다는 도지(미힐 하우스만)의 편지를 받는다. 흥미가 생긴 줄리엣이 건지 섬을 찾아온다. ‘킷’이라 불리는 금발머리 아이를 사람들이 함께 키우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에 대해서 물으니 제대로 대답하는 이가 없다. 그들은 뭔가를 숨긴다.  

시간이 흐르자 줄리엣은 독일군이 섬을 점령한 시기에 이들을 버티게 한 힘의 정체를 알게 된다.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리더였던 킷의 엄마가 포로를 돕다가 잡혀가자, 독일군 장교 사이에 태어난 아기를 문학회 멤버들이 돌아가며 키웠다.


 책을 읽은 그들의 사고는 유연해졌고 사물의 앞보다는 이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변했다. 누구는 술을 끊고, 누구는 신앙을 되찾고, 누구는 이웃과 소통할 줄 알게 되었다. 책은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검열된 시각이 아닌 언어와 역사, 성찰로 가득한 새로운 세상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오랜 친구들이 문자로 설익은 정치적 주장을 주고받다가 한 친구가 카톡방을 나갔다. 날 선 말들이 텔레비전 뉴스와 인터넷을 도배한다. 의견은 양분되어서 접점을 찾을 수 없다.  


  “세상이 모두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실일까?”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게 책의 역할인지 모른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이웃이 우리 아파트가 참 좋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그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아파트 값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지은 지 이십 년이 넘은 우리 아파트는 건물이 낡았지만 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전망이 좋다.


  “요즘 집에만 있는데, 그나마 앞이 트여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다행이에요.”  

  "그렇죠."  


  맞장구를 치며 나는 속으로 덧붙였다.

  책도 그래요. 모든 문이 잠겼을 때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주죠.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델핀 미누이 저, 임명신 옮김, 더숲)

#영화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마이크 뉴웰 감독, 2018)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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