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문학동네
기행은 검지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다시 말했다.
“비. 비는 이렇게 길게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벨라가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럼 바람과 바다는 어떻게 말합니까?”
기형은 제 손등을 당겨 입 앞에 대고 말했다.
“바람. 바람이라고 하면 이렇게 바람이 입니다."
이번에도 벨라는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리고 바다라고 하면, 조선인들은……”
그는 손을 들어 어둠 속 동해를 가리켰다.
“저절로 멀리 바라보게 됩니다. 바다는 멀리 바라보라는 소리입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랬더니 아빠는 힘없는 목소리로, (……) 카자흐 여인들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모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그런 인민들의 힘이라며.
“내게 전쟁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었어요. 전쟁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로, 좋아하는 것들로, 다정한 것들로. 이를테면 잘 길들여진 돼지처럼 순하고, 남국의 산록같이 보드라운 것들로.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두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있다면 그 뒷면에는 미움이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은 서로 붙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를 때였다.
어린 시절로부터 벌써 새나 개구리나 풀이나 꽃에서, 인형에서, 갖은 장난감에서, 비와 눈, 어머니와 동생들, 또 동물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아동들을 교양할 때에라야만 그들은 자라서 의로운 일에 제 목숨을 희생할 수 있으며, 사람을 열렬히, 충실하게 사랑할 수 있으며 (……) 모든 사악한 것들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말하여야 할 것이다.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아동시는 배격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무지한 기도를 아동시는 타기 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일부
“왜 그랬답니까?”
끔찍한 말들을 듣다가 기행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자 영감들이 혀를 찼다.
“이 아바이, 인생 헛살았네. ‘왜?’라는 건 소학교에서나 모르는 게 있을 때 손들고 선생님한테 묻는 거지. 인간사에다 대고 왜가 어딨어?”
“천불이오, 아바이. 천불 났소.”
청년이 말했다. 어쩐지 달뜬 목소리였다.
“천불이 뭐요?”기행이 물었다.
“하늘이 내신 불이란 말이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