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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ul 12. 2020

백석과 나타샤와 삼수갑산

『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문학동네



소개 글을 읽고 바로 그날 책을 사는 건 내게 흔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인터넷 서점 장바구니에 책을 담아놓고 여러 날 묵힌다. 몇 날이 지나 들여다보고는 내가 왜 이 책을 사려했나 잊어버려서 다시 리뷰를 찾아보기도 한다. 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싶을 때 책을 구입하지만, 산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꽤 거만한 독자다. 김연수 작가가 백석에 관한 소설을 썼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나는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팔랑귀를 가진 유혹에 약한 독자이기도 하다.


기행은 검지를 들어 위에서 아래로 그으며 다시 말했다.
“비. 비는 이렇게 길게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그러자 벨라가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럼 바람과 바다는 어떻게 말합니까?”
기형은 제 손등을 당겨 입 앞에 대고 말했다.
“바람. 바람이라고 하면 이렇게 바람이 입니다."
이번에도 벨라는 그 동작을 따라 했다.
“그리고 바다라고 하면, 조선인들은……”
그는 손을 들어 어둠 속 동해를 가리켰다.
“저절로 멀리 바라보게 됩니다. 바다는 멀리 바라보라는 소리입니다.”



책은 빨리 읽게 되지 않았다.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가볍게 읽히지 않았다. 나는 읽다가 시옷자로 덮어놓고 생각날 때마다 이따금 천천히 읽었다.




1937년 ‘고려인’이라 불리던 조선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 열차를 타고 연해주에 6000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까지 쫓겨난 일이 있다. 기차가 떠나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울고 있을 때 어디선가 워낭 소리가 들려왔다. 동쪽에서 낯선 민족이 황야에 버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카자흐 여인들은 빵을 굽기 시작했다. 빵이 식을 새라 모포로 감싸고 당나귀에 실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들을 찾아왔다. 한인들이 울면서 빵을 먹는 동안 카자흐 여인들도 함께 울었다. 빵과 울음. 그곳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나는 이 이야기를 예전 어디선가 읽었다. 하지만 『일곱 해의 마지막』에서 다시 만났을 때 나는 새삼스레 몸의 저 아래쪽에서부터 떨림이 올라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기에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까요?
그랬더니 아빠는 힘없는 목소리로, (……) 카자흐 여인들을 잊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모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건 그런 인민들의 힘이라며.


얼마 전에는 김연수 작가의『밤은 노래한다』를 읽었다. 이 소설은 1932년 만주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을 다뤘다. ‘애국’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피비린내 나는 살육. 두 소설의 시대는 비슷해 보인다. 작가가 이 시대, 체제와 그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려는 건 무엇일까?


기행(백석)은 현명해 보인다. 움츠리고 있다가 조금 상황이 나아지면 시에 대해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점차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 운명의 일부로 여겨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다.


벨라가 말한다.

“내게 전쟁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죽이는 일이었어요. 전쟁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이지만 그 대가는 절대로 멍청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나요? 전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평화를, 상처를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회복을 노래할 수 있나요? 전 죽음에, 전쟁에, 상처에 책임감을 느껴요. 당신 안에서 조선어 단어들이 죽어가고 있다면 , 그 죽음에 대해 당신도 책임을 느껴야만 해요. 날마다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아침저녁으로 죽음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러지 않으면 제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매일매일 죽어가는 단어들을 생각해야만 해요. 그게 시인의 일이에요. 매일매일 세수를 하듯이, 꼬박꼬박.”






1935년 스물네 살이 된 기행은 통영 처니(통영에서 ‘처녀’를 일컫는 말)에게 마음이 끌린다.


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로, 좋아하는 것들로, 다정한 것들로. 이를테면 잘 길들여진 돼지처럼 순하고, 남국의 산록같이 보드라운 것들로.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두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있다면 그 뒷면에는 미움이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은 서로 붙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를 때였다.


1956년 『조선문학』 9월호에 기행은 '나의 항의, 나의 제의'를 발표한다. 이 글은 협동조합과 공장에 관한 것이라면 무조건 좋은 시라고 말하던 당시 문단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


어린 시절로부터 벌써 새나 개구리나 풀이나 꽃에서, 인형에서, 갖은 장난감에서, 비와 눈, 어머니와 동생들, 또 동물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아동들을 교양할 때에라야만 그들은 자라서 의로운 일에 제 목숨을 희생할 수 있으며, 사람을 열렬히, 충실하게 사랑할 수 있으며 (……) 모든 사악한 것들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말하여야 할 것이다.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아동시는 배격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무지한 기도를 아동시는 타기 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기행은 삼수로 좌천된다. 사람들이 ‘삼수갑산’이라 부르는, 우리나가장 북쪽 춥고 험한 산골짜기. 옛적에는 귀양지였던 곳.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삼수에서도 가장 깊은 독골로.

그는 밤마다 발표할 수 없는 시를 쓰고 불에 태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일부


1962년 백석이 마지막으로 쓴 걸로 보이는 동시, 「나루터」가 전해진다. 그것은 '나이 어리신 원수님'을 떠올리며 쓴 찬양시다.

백석은 1996년 세상을 떠났고, 우리는 그를 국수와 나타샤와 여우난골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으로 기억한다.


“왜 그랬답니까?”

끔찍한 말들을 듣다가 기행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자 영감들이 혀를 찼다.

“이 아바이, 인생 헛살았네. ‘왜?’라는 건 소학교에서나 모르는 게 있을 때 손들고 선생님한테 묻는 거지. 인간사에다 대고 왜가 어딨어?”


낯설지만 정겨운 우리말들.


꼬부라진 마음, 강쇠 바람, 안개가 부잇하게 감돌아, 끄무레한 하늘, 첫 젖을 빨고 난 새끼가 마당귀에서 오독독 오독독 뜀질을 하고 가댁질을 하는.


작가는 글로 세상에 말하는 사람이다.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사십  중반 백석의 일곱 해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 한 건 무엇일까.


사라지는 언어를 되살리는 시인의 역할?

광기의 시대를 버티게 한 문자의 힘?

시를 접은 시인의 30년간의 침묵?

글 쓰는 이들이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아냈는지?


“천불이오, 아바이. 천불 났소.”

청년이 말했다. 어쩐지 달뜬 목소리였다.

“천불이 뭐요?”기행이 물었다.

“하늘이 내신 불이란 말이우.”


화전민이 개간하기 위해 피우는 불이 땅 속 뿌리로 타들어가는 지불이라면 천불은 저절로 생겨나 순식간에 숲을 태우는 불이다. 그 불을 보고 화전민은 생을 향한 어떤 뜨거움을, 어떤 느꺼움을 느낀다고 했다. 불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살 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건 희망일지 모른다. 생명의 힘, 인간의 힘, 세상에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걸 믿는 힘.




 #『일곱 해의 마지막』김연수, 문학동네 (2020년)

#『밤은 노래한다』김연수, 문학과 지성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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