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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08. 2020

큰 눈 내린 날

홈쇼핑으로 온갖 물건을 사들였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걸까?

밤마다 비가 온다. 빗방울이 툭툭 창틀을 건드려도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젠 장대비가 쏟아져도 세상모르게 잠을 잔다.


여름다운 여름 없이 입추를 맞았다. 앞으로 장마가 한 달을 더 갈지 모른다는 우울한 소식도 들린다. 이렇게 큰 비를 십 년 전쯤 한 번 봤다. 내가 생각하는 큰 비의 기준은 아파트 옆 하천의 강둑이다. 그때도 빗물은 강변 산책로와 넓게 펼쳐진 잔디밭, 동아줄 드리워진 큰 그네를 삼키고 찻길 있는 강둑까지 다가와 넘칠 듯 출렁댔다. 그땐 단지 며칠간의 폭우였다.


이런 날이면 나는 창밖을 내다본다. 물이 넘어오는 광경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하주차장으로 물이 밀려들면 차를 어떻게 해야 하나, 저기 멀리 뒷동으로 옮겨 놓을까 생각도 한다. 하천변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할까. 봄에 심은 친구의 포도밭 어린 묘목들은 무사할까. 이렇게 햇빛을 안 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파트 뒤쪽에 있는 친구의 텃밭은 무사할까. 혹시 토마토와 상추는 모두 쓸려가고 흙탕물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주식을 하는 친구가 무너질 줄 알았던 대한항공이 흑자라 했다. 여행 승객 대신 화물을 그리 많이 실어 날랐다나.


눈이 엄청 많이 내린 해가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간 후 순식간에 내린 폭설이었다. 아마 한두 시간 내렸을 텐데, 망설이다 길을 나선 남편은 이십 분 거리의 직장에 겨우 도착하니 점심시간이었고, 바로 삽을 빌려 눈을 치워가며 집에 오니 저녁이었다.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은 비슷한 거리를 종일 걸어서 집에 왔다. 아마 아들도 기억하고 있으리라. 아들은 한동안 그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하곤 했다. 친구들과 눈을 헤치며 걸어온 그날은 좋은 추억이 되었으리라. 우린 갑작스러운 폭설에 일주일을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뭘 하며 지냈냐고?


우울한 우리를 달래주려고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우린 홈쇼핑으로 온갖 것을 사들였다. 만두, 국, 김치, 먹을 것은 기본이고, 입을 것, 살림살이 등등. 아마, 눈 치울 삽도 사지 않았을까? 눈이 녹고 나니 뒤늦게 매일 현관 벨이 울렸다. 띵똥 띵똥 띵똥.

산 기억도 나지 않는 물건들이, 이젠 관심 없는 물건들이 집에 들이닥쳤다.


코로나가 한창이어서 집에만 있었던 3월과 4월에 나는 신발을 많이 샀다.

이젠 구두 신을 일이 없겠어, 하고는 운동화를 두세 켤레 샀고 그다음엔 아이보리, 핑크 구두를 주문했다.

발이 평범하지 않아서 온라인으로 산 게 맞을 확률이 별로 없었다. 구두는 두세 번 반품 처리한 후에야 그나마 연한 핑크 하나를 건질 수 있었다. 평소에 반품하는 걸 싫어한다. 반품에 정체 불분명한 죄의식을 갖고 있는 편인데, 사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컸다.


신발은 내게 갈망이었다. 가지 못하는 이곳저곳을 지치도록 걸어보는.


현관에 나란히 놓인 신발을 보며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웬 신발을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무심한 성격이라 새로 산 신발인 줄 몰랐을 수도 있고, 평소 정리 잘 안 하는 나를 아는 터라 언젠가 다 버려야지 생각하며 바라봤을 수도 있다.




-스카치테이프 어디 있니?

-거기.

토요일 느긋한 아침을 아니, 브런치를 먹고 있는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아래 서랍

-없는데?

-아님 저쪽 서랍.

-없어. 어딨는데?

-내가 아는 곳에 있어.


남편이 내 머리를 한 대 치고 지나간다.

(흔들)


좀 전부터 나는 식탁 위에 놓인 축의금 봉투를 보고 있었다.


-그거 테이프로 붙이지 마. 꺼내는 사람 성가셔. 요즘 아무도 안 붙여.

남편은 늘 축의금 봉투를 테이프로 붙이는 습관이 있다.


커피를 마시러 식탁에 앉은 남편이 말한다.

-퇴직하면 내가 싹 다 버려야지. 요즘 살림 정리 플래너가 있데. 언제 샀냐, 앞으로 쓰고 싶냐 물어보지만 웬만한 건 다 버린데.


난, 주워 올 건데.

이건 침묵 중 나의 생각이다.


-버리지 못하는 게 병이지. 안 버린 것 중에서 90%는 안 쓴데. 죽을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은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데.

남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후일 우리는 2020년 오늘을 무엇으로 기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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