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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31. 2020

8월과 아버님의 전쟁

달력을 뜯으며


해가 바뀔 때마다 벽에 거는 달력 하나를 어떻게든 구하려 한다. 

예전엔 차고 넘쳤지만 요즘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어느 순간부터 탁상용 달력만 들어왔다. 주로 핸드폰의 메모 기능을 이용하더라도 매 달이 시작하거나 마칠 때면 달력을 바라보게 된다. 종이를 뜯어내야 해서다. 그럴 때마다 지난달엔 무슨 일이 있었고 다가오는 새 달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게 된다. 


집에만 있느라 날짜와 요일 개념이 없어져 최근에는 달력을 더 자주 바라본다. 아침에 지난 8월 달력을 뜯어냈다. 버리려고 접다가 나는 다시 달력을 펼쳤다. 참석하지 못한 결혼식과 여러 모임이 동그라미로 그 위에 가위표가 겹쳐져 표시되어 있었다.


‘군산’이라 쓰인 날이 있다. 친구들과 가볍게 하루 여행 다녀오려고 군산의 구경거리를 열심히 메모했는데 결국 가지 못했다. 그날엔 큰 비가 내렸다.


성당 세례식이 예정되었던 날도 있다. 이 표시는 아마 연초에 일찌감치 해 놓았던 것 같다. 달력을 벽에 걸 무렵 아니었을까? 축하해주고 싶은 마음에 미리 표시해 놓았다. 달력을 걸기 전에 늘 일 년의 기억해야 하는 날들을 적어 놓는다. 부모님과 아이들 생일, 제사 같은 특별한 날들.


옆 동네의 카페 이름이 적힌 날은 독서모임 예정일이다. 가지 못 했고, 모임도 깨졌다. 오해가 있었고, 그 안 어디에는 욕심과 질시도 있었던 것 같다. 예전처럼 관계에 많이 집착하지 않는다. 여러 일들을 겪고 나서 사람에 대한 기대, 신뢰가 많이 무너졌다. 굳이 목매지 않고 인연이 거기까지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인다. 상처 받지 않으려는 방어기제일 수도 있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영원한 게 없다는 달음 때문이기도 하다.


시작한 지 몇 달 안 된 모임이지만 그중 한 두 사람에 대해 좋은 느낌이 남아 있다. 그런 감정을 한 번씩 되살리면 기분이 유쾌해진다. 무의식 중에 말실수를 했고, 마음에 걸려 다음날 사과의 문자를 보냈다. 그녀는 넉넉한 마음으로 아무렇지 않았다고 답했고,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짧은 만남이었으니 그런 일도 없었다면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으리라. 사소한 마찰과 수습 과정이 그녀를 제대로 알게 했다. 그래서 모임은 깨졌어도 그녀는 내게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다. 


달력 아랫부분에 새로운 독서모임 날짜가 표시되어 있다. 여기도 참석하지 못했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실시되면서 열 명 이상 모임은 제한되었다. 이 모임은 여덟 명이니 가능하지만, 지역 전체에서 모이는 모임이라 누구나 전파자가 될 수 있었다. 조용히 빠지겠다고 문자를 했다. 리더는 모임을 할 것인지, 연기할 것인지 투표에 부쳤다. 모임은 다음 주로 연기됐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도 갈 생각이 없다. 코로나가 원인이지만 사실은 바로 전에 깨진 독서모임의 영향이 컸다.


합평의 선은 어디까지일까. 처음 글쓰기 수업을 가르친 선생님은 신랄한 비평가였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항상 따뜻한 마음을 느꼈기에 어떤 말에도 상처 받지 않았다. 이후 문화센터로 옮겨갔을 때 나는 배운 대로 합평 대상자들의 글을 매우 꼼꼼하게 읽었다.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고 맞춤법 띄어쓰기까지 수정해서 합평이 끝나면 그들에게 줘도 되는지 물어보고 주곤 했다. 속마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고마워했다.


이런 방식이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글을 써서 가져온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내 글에 대한 비평도 마찬가지였다. 계속 "잘한다. 잘한다." 칭찬만 들어온 사람들의 글을 봤는데, 그런 글들은 이후에도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8월의 마지막 금요일에는 도서관 반납이 표시되어 있었다. 책은 아직 몇 권 집에 있다. 도서관이 문을 닫았기에 천천히 읽고 반납함에 넣을 예정이다.


두꺼운 달력 종이를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어서 버리려다 보니 종이가 무척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아버님은 늘 이 달력 종이를 꼼꼼하게 4등분으로 잘라 뒷면에 빼꼭하게 글을 쓰셨다. 읽어보면 별 내용이 아니다. 문중의 족보나 신문의 기사를 옮겨 적은 글이었다. 나지막한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건 아버님의 즐거운 소일거리였다.


오래전 제주 시댁에 갔을 때, 아버님은 처음으로 살아오신 이력을 말씀해 주셨다. 추운 밤이었다.

제주 중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님은 군대를 갔는데, 제대하려니 계속 괴롭히던 상사가 복무 기록을 내주지 않았다. 중학교 때 공산주의 서클에 가입한 게 문제가 됐다. 이 이력은 평생을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우연히 같은 이름을 가진 지인의 도움으로 서류를 갖고 군대를 나올 수 있었다.


4.3 사건 때는 두 번 끌려가 총살당할 뻔했다. 군대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의 지인과 동네 경찰 서장이 구해줬다. 아버님 마을에는 지금도 그 경찰 서장의 공덕비가 서 있다. 생의 고비마다 아버님께 도움을 준 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자기 소신이 있던 분들이었다.


아버님은 모든 순간 가족만 생각하셨다. 집으로 돌아오기만 바랬다. 아버님은 서클 가입 경력을 덮기 위해 경찰이 되었고, 이후에는 교사, 삼십  초반에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셨다. 아버님은 며느리인 내가 보기에도 반듯하고 성실하신 분이다. 지금도 이른 아침 시댁에선 마당에서 비질하는 소리가 들린다. 시댁은 시골이어도 아버님의 관리 탓인지 파리 한 마리 볼 수 없다. 동네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이 아버님을 찾아온다. 아버님은 누구에게 목소리 크게 한 번 내는 법이 없어서 아흔이 넘은 지금도 동네 사람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계신다.


그날 밤 나는 종일 여행을 마친 후여서 아버님의 이야기를 까무룩이 졸며 들었다. 비행기와 자동차를 갈아타고 시댁에 들어가느라 지쳤아랫목이 무척 따뜻했다. 

'아, 저 이야기를 기억해야 되는데. 어디 남겨놓아야 하는데.'


다음 날 아침, 아버님께 기억의 끊어진 부분을 물었더니 아버님은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셨다. 잠시 후 아버님은 달력 자른 종이 몇 장을 들고 나오셨다. 간밤에 하신 말씀들을 적은 글이었다. 후일 아버님은 '자손들에게 전하는 나의 인생 이야기'라는 책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아마 이 일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8월 달력을 뜯어서 분리수거함에 넣으며, 나는 지난달 내게 일어난 일들과 아버님의 전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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