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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29. 2020

내 친구, 영희

나를 '있는 나'로 이해해주는 친구



누가 내게 절친이 있냐고 물으면 나는 영희라 대답한다.

영희는 대학교 일 학년 때 서클에서 만난 친구다. 학교는 달랐지만, 영희네 집이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여서 나는 수업을 마치면 영희 집에 가서 이불에 발을 묻고 온갖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놀곤 했다. 같은 과 친구들보다 영희랑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그만큼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영희는 화내는 법이 없었다. 둥글둥글한 성격에 은근히 유머러스해서 함께 있으면 절로 즐거워졌다. 작은 일에도 심각해지는 나와 반대여서 우리는 성격이 잘 맞았다. 그녀는 가끔 진지하게 충고도 하지만, 나를 ‘나’로 이해해주는 친구 한 명을 꼽으라면 나는 영희를 꼽는다. 영희는 늘 내가 과분하게 여길 만큼 무한 신뢰를 보냈다.


처음으로 포르노 영화를 본 곳도 영희 집이었고, 궁금해하는 내게 '펜트하우스' 잡지를 구해다 준 것도 영희였다. 당시 영희 남동생은 고등학생이었는데, 우리 심부름을 곧잘 했다. 어느 날 영희랑 죽이 맞아서 우리도 그런 영화 한 번 보자며 남동생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굉장히 야한 영화라야 해." 셋이 나란히 앉아서 보다가 깜짝 놀라서 모두 벙어리가 됐다. 중간까지 봤는지 보다가 껐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방은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리게 고요했다. 목이 뻣뻣하게 긴장해서 보다가 "나, 간다." 하면서 허겁지겁 영희 집을 나서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도, 영희도 결혼했다. 어느 틈에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 이전부터 나는 영희가 어느 부잣집 막내아들과 결혼해 돈 걱정하지 않고 평생 잘 살 거라고 말하고 다녔다. 우리 시절엔 덕담처럼 그런 말을 흔히 했다. 

년 전 친구들과 소식이 닿아 수소문 끝에 영희를 찾았다. 영희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여전히 잘 웃었다.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올 때면 집 앞에 마중 나가 둘이서 소주 한 병 마시고 손잡고 들어오는 이야기를 했다. 영희는 웃다가 이따금 "아이고 내가 이렇게 즐거우면 안 되는데." 했다. 나는 영희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랐다. 


영희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들었다. 영희는 아들이 중학교 다닐 무렵인가 남편을 잃었다. 사고였다. 나를 만났을 때 영희는 남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남편과의 좋은 추억만 끄집어냈다. 영희 남편 소식을 들은 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난다. 나도 영희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여전히 영희는 즐겁다. 영희는 상담교사가 됐다. 젊은 애들을 상대해야 하니, 늘 긴장해서인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작년에 역에 마중 나왔을 때 영희는 나한테 잔소리를 해댔다. 양미간에 주름이 생겼다고, 제발 다음에 만나러 올 때는 없애고 오라고 했다. "넌, 그것만 없으면 돼." 집에 와서 나는 며칠간 양미간의 주름을 쳐다봤다. 손으로 펴 보기도 하고, 이걸 어떻게 없애나 고민도 했다. 주름이 깊어서 보톡스로는 안 될 테고, 필러는 넣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힘들어. 젊은 애들이 올라오니, 계속 공부해서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해. 젊은 상담교사들과  세대차가 나서 대화하기도 힘들고.

만날 때마다 나는 영희가 안쓰러웠다.


옛 서클 친구들과 만나면 영희는 더 씩씩해졌다. 영희는 서클 남학생 한 명을 좋아 헸다. 내가 알기론 그도 영희를 싫어하지 않았다. 인연이 안 되어 사귈 것도 없이 헤어졌지만, 서클 모임에서 만나면 우리는 그들을 슬그머니 놀린다. 문제는 영희는 남자 같아져서 "이쪽으로 오세요." 하며 자리를 만들기도 하는데, 그 남학생은 여전히 수줍어한다. 


며칠 전 영희 전화를 받았다.


-나, 기간제 교사 됐어. 축하해줄 거지?

-당근이지. 근데 네가 어떻게 선생님이 됐니?

-응, 교사가 부족하데. 게다가 나, 담임도 맡았어.

-뭐라고? 야, 너, 정말 대단하다. 넌, 정말 좋은 담임이 될 거야.

-응, 실은 요즘 아무도 담임을 안 맡으려고 해. 수당은 십만 원 더 주는데, 일은 힘드니까. 담임하라면 그만둔다는 선생도 있어.

-그래? 세상이 많이 바뀌었구나.

-응. 이제는 선생과 학생 사이도 예전 같지 않아.

-네가 맡은 애들은 정말 좋겠다. 너 같은 선생이 어딨니? 걔들은 복 터졌다.

-히히. 그렇긴 하지. 힘들긴 하지만 이 나이에 '선생님 사랑해요.' 이런 말 어디서 듣겠니?


다음 날 저녁, 나는 남편에게 영희 이야기를 했다.


-영희가 선생님이 됐데. 그것도 담임.

남편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내가 이야기했던가?

-응. 어제도 그제도 이야기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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