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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29. 2020

쿨하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성교육 도서



여성가족부에서 초등학생용 성교육 교재를 베포 했다가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교재는 외국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재로, 그중 문제가 제기된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1971년 덴마크에서 출간돼 덴마크 문화부에서 아동도서상을 받았다고 했.


-굳이 초등학생에게 이럴 거 까지 있나요? 동성애에 대해 설명할 것 까진 없죠.

-이미 서구에선 동성혼이 합법화된 지 십 년이 지났어요.

-개방적인 외국의 교과서와 보수적인 한국 사회의 성 인식은 균형이 맞지 않아요.

-저 책 아무 문제없지 않나요?

-초등생 성교육을 재미로 접근해선 안 되죠.

-서구식이 무조건 좋다는 발상은 문제가 있어요. 섹스는 좋고 재미있는 것이라는 개념부터 가르쳐선 안 되죠.

-어린이일수록 정확한 표현을 써 줘야 해요. 외국 것이 우리 현실과 맞지 않을 거라는 게 편견일 수도 있어요.

-사회적 합의에 의해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해요. 외국에서 검증된 교재라고 아무런 설명 없이 갑자기 뿌리니 반응이 이렇잖아요.

-제가 사는 캘리포니아에서도 부모들이 정부를 상대로 싸우고 있어요. 부모 입장에선 그럴 수밖에 없어요.

-뭐 이런 걸 가지고 논란을 벌이나. 21세기에 이러면 안 되죠.

-재미있는 섹스라니!

-으악, 저런 걸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포르노나 섹스 장면을 자연스럽게 보고 자란 아이들은 자신도 그런 행동을 해도 된다고 모방하게 돼요. ‘조기 성애화’라 해요.


책에 대한 반응은 여러 가지로 다양했는데, 그 안에 우리 사회의 다양한 생각의 스펙트럼이 보여 흥미롭기도 하고, 착잡하기도 했다.




성에 대해, 여성의 몸에 대해 처음 인지한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모여서 쉬쉬하며 이야기하는데, 내용은 초경에 관한 온갖 풍문이었다. 들으니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물에 담긴 붉은 스답(면 생리대를 그때는 이렇게 말했다).

섹스에 관해선 중학생이 되어서 초경을 하고 난 후 언니에게 들었다. 의문이 생겨서 물었는데, 아마 이런 말이었을 거다.


-언니, 아기는 어떻게 생겨?

언니는 한참 망설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여자와 남자의 몸을 생각해봐. 어딘가 다른 데가 있지. 그게 왜 그럴까.

그 말 뿐이었는데, 듣고 나서 남녀의 몸 생김새를 상상하는데 깨달음이 왔다. 아, 그런 거구나.

그런 정도의 성 지식을 가지고 이십 대 중반에 결혼했다. 신혼여행 가선 좀 당황했다.




성교육 교재의 이런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행할 때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권리, 이혼 한 뒤에 종일 아이를 보지 않아도 될 권리, 이혼은 여성의 권리.『엄마 인권 선언』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원할 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 두 남성 커플과 아이들로 구성된 가족의 모습 그림.『아빠 인권 선언』

『아들 인권 선언』과 『딸 인권 선언』에서도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며 두 동성의 그림을 예시한다.『엄마는 토끼 나는 펭귄 나는 토펭이』에선 이종간 결합을 이야기하고,『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에선 섹스를 아주 세밀히  ‘신나고 멋진 일’이라고 설명한다. 불임부부의 체외수정과 체외수정 시술 방법도 나와 있다.『걸 스토크』에는 여성의 생식기를 크게 그려놓았다. 섹스 후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손쉬운 방법으로 콘돔을 끼면 된다고 알려준다.


가려진 걸 완전히 열어서 보여준다는 의미에선 일면 솔직한 책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계속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그게 뭘까? 마치 세탁기 사용법을 설명하는 매뉴얼 같지 않나…. 욕망이 생기면 소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건가?

하고 싶은 데, 뭔지 모르고, 방법을 몰라서 못 했어. 방법을 가르쳐 줄게, 이런 거야, 이렇게 하면 돼. 이런 교육이 아니더라도 이미 사회에는 성을 즐기되 임신만 하지 않으면 된다는 쿨한(?) 생각이 팽배해 있지 않은가. 책은 개인의 쾌락과 성적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많은 성교육이 생물학적, 심리학적 입장으로 피임 교육을 한다. "성적 욕구가 생기고 이성교제를 시작했다. 콘돔과 피임약으로 임신을 막을 수 있으니 성관계를 해도 좋다. 성적 자극이 왔을 때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남녀는 성 심리와 성행동에 큰 차이를 보인다. 성관계는 강요되어서는 안 되지만, 남녀가 합의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성적 쾌락을 통한 행복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교재는 성을 일종의 놀이처럼 설명하고 있었다. 성을 생물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바라본다. 사람과 동물이 구별되는 인간의 영적인 부분에 대해선 아무 설명이 없다. ‘자제’와 ‘정결’에 대한 개념을 찾는 건 시대착오적인 나만의 생각일까.

책은 성적 쾌락을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권리로 인식시킨다. 이런 문화 환경에서 성장하고, 이런 교육을 받게 되면 성관계를 재미있는 놀이로 여기게 되고 쉽게 성관계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단순히 낙태만이 문제가 아니다. 호기심에 이끌려서 맺은 성관계는 두 사람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인간은 섬세한 영혼을 가졌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성적 결합이 ‘소중한 생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 것, 성을 ‘절제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스무 살 무렵,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 교생 실습을 나간 적이 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남학생들은 나보다 체격이 훨씬 컸다. 팔씨름을 하자고 해서 손을 잡았는데, 내 손이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가 안 보였다. 녀석이 질문을 했는데, 나는 당황해서 얼렁뚱땅 둘러대고 말았다.


-선생님, 섹스가 뭔지 아세요?

녀석이 능청스레 물었다.


-응? 섹스? 남자 여자를 말하는 거지. 남성과 여성.

아무렇지도 않은 척 태연하게 말했다. 속으론 엄청 당황했다. 그래서 아직 이 일을 기억하고 있다. 진지하게 말할 분위기도 아니었고, 녀석의 태도에서 짓궂은 뭔가를 느꼈다. 


아이들의 몸과 정신이 나란히 함께 여물면 좋겠지만, 이 두 가지는 불쑥 키 자랐다가 살 붙고, 다시 반복하는 것처럼 울툭불툭하기만 하다. 녀석은 이미 자기의 방식으로 성에 대해 알고 있었다. 


초등생 성교육은 성교육의 입문 과정이다. 그러기에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 아이들이 물었을 때 부모, 선생님, 주위 사람들이 성에 대해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성에는 사랑에 대한 책임이 따르고, 남녀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도 형성되어야 한다. 성관계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어느 정도 절제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면 좋지 않을까?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온오프라인에서 거세지자 정부는 임신 14주24주까지 낙태가 가능한 입법예고안을 냈다. 현행법보다는 개선됐지만, '낙태를 범죄'로 보는 시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럽은 1960년대부터, 미국은 1973년부터 낙태를 허용했다.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라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불법 시술로 인한 사망자를 줄일 수 있다는 게 그 이유다.

낙태가 불법인 한국에선 매년 5만 건의 시술이 이뤄지는데, 실제론 일이십 배 더 많다 한다. 10대의 출산은 매년 1000 건이 넘는다. 법으로 낙태를 막을 수 있을까? 원치 않는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내실 있는 성교육과 혼자서 아기를 낳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게 낙태를 막는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인다. 세상을 '삼십 센티미터 자'라고 본다면 사람들의 생각은 밀리미터 눈금처럼 다양하지만. 



#여가부의'나다움 어린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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