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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Aug 26. 2020

비틀거린 봄날

늘 이렇게 웃고 살면 좋을 텐데


성급하기로 치자면 봄꽃을 따를 게 없다. 갈색 나뭇가지가 연둣빛 기운을 띠기 시작하면 순도 나기 전에 나무는 화들짝 꽃을 피운다. 매화, 살구꽃이 하얗고 단아한 자태를 선보이면 노란 산수유가 꽃망울을 맺고, 벚나무가 꽃을 피운다.


벚꽃을 보면 모가 떠오른다. 일찍이 혼자되어 씩씩하게 사업을 하던 이모는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전 재산을 절에 맡겼다. 제사를 지내줄 자식도 없었으니 이모 딴에는 평생을 의지해 온 절에 마지막으로 큰 보시를 한 셈이었다. 물론, 우리 어머니서운해했다. "조카는 자식 아이가." 한 마디 중얼거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정치인으로, 무슨 여성회 대표로 활발하게 사회생활을 한 이모의 장례식에는 함께 일하던 여자들이 총동원되어 분홍 저고리, 초록 치마를 입고 나타났다. 여자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치 가을 골짜기에 핀 봄 같았다.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어느 하루 꿈인양 사라지는 봄꽃처럼 이모는 돌아가셨다. 




지난겨울 이사 온 새 집이 추워서 나는 거실에 두꺼운 커튼을 달았다. 바람 한 점 들어오지 않게 여민 커튼 속에서 나는 겨울을 보냈다. 몸이 움츠러드니 마음도 가라앉았다. 커튼은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커튼 틈으로 벚꽃 잎 하나가 창에 붙었다가 나비처럼 나풀나풀 카오스를 그리며 떨어지는 걸 봤다. 봄은 이미 와 있었다.


정원의 공기는 시큼하며 달았다. 어디선가 향내가 풍겼다. 봄은 겨우내 빗장 채운 오감의 문을 열어 나는 예민하고 명징해졌다.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이 흘렀고 언 땅이 녹으며 습기가 피어올랐다. 풀 냄새. 거름 냄새. 정원에선 부패와 생성이 함께 일어나고 있었다. 겨울이 멈춤이라면 봄은 움직임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풀잎을 흔들었다. 살갗은 선득했지만 공기는 더 이상 차지 않았다. 나는 가슴 깊이 봄을 들이마셨다.


아파트 앞의 오일장은 봄이 주는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란히 줄지어 선 붉고 푸른 천막 아래 생선과 건어물 갖가지 채소와 과일이 즐비했다. 다음날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말끔해질 거리에서 언 땅을 헤집고 나온 달래, 냉이, 쑥, 원추리, 취와 더덕이 소쿠리가 비좁다며 밖을 내다봤다. 굵은 대파가 눅진한 연두 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따뜻한 봄날이 준 여유일까? 건어물 가게 앞에 아주머니 대여섯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웃하며 들여다보니 아침부터 막걸리 파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선전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활짝 웃는다. 내가 새댁일 땐 그녀도 새댁이었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트럭에 생선을 싣고 이곳저곳 아파트를 옮겨 다녔고, 세월이 지난 지금은 오일장에서 생선을 팔고 있다. 설이면 사람들이 동태 포를 뜨려고 그녀 앞에 길게 줄은 섰다. 장갑 낀 손으로 얼음덩이 같은 동태를 부여잡고 포를 뜨는 모습은 보기에 안쓰럽다. 고왔던 피부는 어느 틈에 투실투실 거칠어져 이제는 영락없는 장터 아낙 얼굴이다. 웃는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삼십 년이 지났어도 그녀의 삶은 크게 나아진 것 같지 않지만, 그녀는 늘 밝게 웃는다.  


"한 잔 하고 가세요." 그녀가 나를 잡아당겼다. 아낙들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구경하느라 금방 자리를 뜨지 못했던 탓이다. 오일장을 그리 오래 다녀도 그들에게 술 한 잔 얻어 마시기는 이 날이 처음이었다.


"반 잔만 주세요" 말하는데 우윳빛 막걸리가 종이컵에 가득 넘치게 다가왔다. 술병을 보고 '원 막걸리'네, 했더니, 술 좀 마실 줄 아는 아줌마라고 손뼉 치고 웃느라 야단이 났다. 컵을 비우자, 샛노란 멍게가 젓가락에 집혀 코 앞에 와 있었다. 한 입 먹고 돌아서려는데 다시 잡혔다. "왜 자꾸 발을 빼요?" 해삼이 왔다. 얼른 삼키고 나는 자리를 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파티는 추운 겨울을 버텨낸 기념이다. 고단한 하루가 기다리고 있는 그들의 짧은 축제다.


술 탓인가? 더워서 스카프를 풀고 겉옷을 벗었다. 몸이 가벼워지니 마음도 들떴다. 장에 나온 사람들이 마치 봄나들이 나온 사람들 같았다. 지나가던 남자가 나를 보고 웃었다. 

'술 마신 표시가 나는 걸까? 아니, 실없이 웃고 다녀서 그런가 보다.' 

웃으니 굳은 마음이 풀렸다. 딱딱한 마음이 부드러워졌다. 늘 이렇게 웃고 살면 좋겠다.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지나가던 강아지가 나를  따라왔다. 

내게서 뭔가 맛있는 냄새가 나는 걸까? 소쿠리엔 냉이, 쑥, 달래, 봄나물 밖에 없는데.


-아가야, 네 먹을 건 없단다.

남자가 줄을 잡아당겼다.

-엄마한테 가야지.


며칠 전, 남동생은 이모의 유골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어찌 된 셈인지 그 큰 절이 망했다고 했다. 더 이상 유골을 보관할 수 없다는 말에 동생과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골짜기를 메웠던 수많은 분홍색 한복이 떠올랐다. 이모를 따라다니던, 이모를 배웅하던 그 여자들은 다들 어디로 갔을까?

길가에 벚꽃이 만개했다. 바람에 꽃비가 날렸다. 며칠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꽃잎이 오일장의 텐트 위에, 지나가는 여자의 찰랑이는 검은 머리에 분홍색 수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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