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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Sep 02. 2020

철이 엄마

당신을 응원합니다



그 남자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다닐 무렵 어느 봄날 오후였다.


버스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면 집과 아까시나무가 보인다. 보풀보풀한 하얀 꽃이 지붕을 덮고 있었으니 오월 즈음이다.

검은 갓에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런 복장이라면 어디선들 쉽게 눈에 띄지 않을까. 나는 신기한 풍경을 보듯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집이 바로 옆이어서 별로 두렵지 않았다. 소리치면 들릴 거리였다. 주춤주춤 다가가니 남자는 ‘철이 엄마’를 아느냐고 물었다.


아줌마가 우리 집에 온 때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부터 아줌마는 우리 집에 있었다. 마치 옛적부터 함께 살았던 가족처럼. 나중에 엄마가 흘린 말을 주워 담아보면 아줌마는 돌 지난 철이를 등에 엎고 우리 집에 왔다.


고개를 끄떡이자 남자는 아줌마를 불러 달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남자는 수줍어 보였다.

아줌마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떠는 것 같았고 당황해했고 불안해했다. 나는 나가서 아줌마가 만나지 않겠다 한다고 남자에게 전했다.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땅만 내려다봤다. 바람이 도로에 떨어진 아까시 꽃잎을 이리저리 쓸고 다녔다. 남자의 침묵이 길어지자 나는 슬며시 조바심이 났다. 집에 가고 싶었다.

남자는 키가 컸고, 철이 아빠라기엔 나이가 들어 보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루마기는 하얗지도 깔끔하지도 않았다. 어딘지 담뱃진에 찌든 것 같았다. 돌아서는 나를 남자가 붙들었다. 한 번만 더 물어봐 달라고 했다. 졸지에 나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전령이 되었다.


아줌마는 결심한 듯 앞치마를 벗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가다듬었다.

 "멀리 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야 해." 


나는 아줌마 뒤를 따라갔다. 바람은 불었고 꽃잎은 계속 떨어졌다. 바람에 쓸린 꽃이 나무 밑에 하얗게 쌓여 있었다. 길에는 짙게 아까시 꽃향기가 풍겼다. 남자는 아줌마를 보더니 반가운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줌마가 긴장하는 게 등 뒤에서 느껴졌다.

아까시나무 뒤에서 나는 두 사람을 지켜봤다. 아줌마가 부탁했으니까 일정한 거리에 있어야 했다. 아까시나무 줄기를 하나 꺾어 손가락으로 잎을 튕겼다. 철이랑 많이 해본 거다.


“아줌마, 아저씨. 아줌마, 아저씨.”


혼자 하는 아까시 잎 놀이는 재미없었다. 아까부터 귀는 저쪽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러놓고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지? 남자는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무성한 아까시나무를 한참이나  올려다봤다. 나뭇잎 속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듯. 아줌마는 평소와 달리 냉랭해 보였다. 긴장한 자세로 시선은 비스듬히 다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럴 거면 뭐 하러 불러 달라 했담.


나는 답답해졌다. 뭐라고 아저씨가 아줌마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넸으면 싶었다. 들고 있던 나뭇잎은 모두 튕겨져 나갔다. 아줌마가 이겼다. 심심해진 나는 이제 긴 가지를 하나 꺾어서 땅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뭐를 그리겠다는 건 없었다. 지루해져서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힐끗 아줌마를 보니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남자가 갑자기 킁킁 콧소리를 냈다. 뒷짐을 지고 아줌마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어딘지 불안한 눈치였다. 등이 더 굽었다.


남자가 돌다가 멈춰서 아줌마를 바라보면 아줌마는 시선을 돌렸다. 다시 남자가 돌다가 아줌마를 바라보면 아줌마는 또 다른 방향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도 킁! 하는 남자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건 남자의 결심 같았다. 무언가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땅을 긁던 가지의 끝이 남자의 기침소리에 멈췄다. 두어 발자국 남자가 아줌마에게 다가갔고, 아줌마는 좌석의 같은 극처럼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남자가 무언가 말했다.


버스가 지나갔다. 나는 기회를 틈타 얼른 두 사람에게 좀 더 가까운 아까시나무 뒤로 다가갔다. 그래도 남자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줌마가 도움을 청하듯 내 쪽을 바라봤다. 나는 당황해서 모른 척하고 아까시나무 뿌리 위를 깨끔발로 건너뛰기 시작했다. 나무는 뿌리가 두두룩했다. 땅 위로 드러난 뿌리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잇고 있었다. 한쪽 나무에서 빨아올린 물과 양분을 이웃 나무와 나누어 쓰는 것 같았다.

아줌마가 나를 불렀다. 나는 뛰기를 멈추고 달려갔다. 아줌마의 손이 선득하니 차가웠다. 내 손을 움켜쥐고 아줌마는 단호하게 돌아섰다. 뒤에서 남자가 우리를 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몇 번 더 우리 집을 찾아왔고, 나는 몇 번 더 아줌마에게 남자의 말을 전했다. 아줌마는 이 날 이후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 남자는 대부분 아까시나무 밑에서 아줌마를 기다리다 힘없이 돌아가곤 했다.

후일 나는 아까시나무가 꽃을 피울 때면, 짙은 초록 잎이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할 때면, 이따금 나무 아래에서 하안 도포자락을 본 것 같았다. 남자가 조용히 왔다간 건지, 내가 헛것을 본 건지 나는 몰랐다.


그때는 도망 나오는 것 밖에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많은 여자들이 남자가 찾아올까 봐 가족과 소식을 끊고 숨어 살았다. 철이 엄마같이 유순한 사람도 용기를 냈다. 살기 위해서.


간밤에 『김지은입니다』를 읽었다. 사건이 일어난 지 2년이 지났다. 지금에야 왜 새삼스레 그 책을 읽었냐고 묻는다면, 우연히 김지은 사건에 증언을 한 사람들이 실직하고 한국을 떠나고,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와, 친구들은 김지은 사건에 대해 떠도는 온갖 소문과 추측을 실제로 믿었다. 우리가 무심코 주고받았던 말들이 그대로 책에 실려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같은 여자였지만, 우리는 김지은 편을 들지 않았다. 남자에게 훨씬 너그러웠다. 나는 미안했다. 사과하고 싶었다, 김지은에게.


책을 덮었을 때 나는 오래전 아까시 꽃 피던 그날이 떠올랐다. 

부엌 옆, 재봉틀 하나 놓인 작은 방에서 아들을 키우던 한 여자도. 

 


#김지은입니다

#김지은을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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