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이고도 낭만적인 공간에 대하여
야무졌던 여섯 살의 크리스마스 소원 덕에, 내 집 마련의 꿈은 이룬 지 오래다. 생애 첫 자가(自家)는 인형의 집의 선조급인 『쥬쥬의 이층 집』이었다. 두 팔로도 채 감싸 안아지지 않는 버거운 크기에서 고스란히 그 포만감이 느껴졌다. 핑크&화이트 이국적 색감, 복층 구조, 공주 풍 조각이 새겨진 창 틀, 벽난로까지 겸비한 궁전 같은 집이었다. 실내 등을 켜는 방법 또한 동화적이었는데, 2층 바닥의 단면에 열쇠를 꽂아 돌리면 되는 식이다. 첫 불을 밝히던 장면은 상당히 극적이었다. 엄마 아빠가 열쇠의 쓰임을 고민하는 와중, 주저 없이 열쇠를 빼앗아 제 자리에 꽂고 돌렸다. 꽂는다, 돌린다, 한번 더. 마치 만화영화 주인공이 눈치 채지 못한 거룩한 운명을 마주하는 순간처럼, 열쇠를 돌리는 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흘러갔다.
마법의 주문을 외워 변신하듯 온 집안에 불이 들어왔다.
유난스러운 만남과 달리 이별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철거되었는지, 새 주인을 만났는지-기억하지 못한다. 산타가 괘씸죄 적용이라도 한 것 마냥, 두 번째 자가 마련은 쉬이 이루지 못할 것만 같은 달갑지 않은 예감이 앞선다.
취업 관문을 통과하자마자 배운 것은 집이라는 단어 앞에 선수되는 숙연함이오 무게감이다. 집에 담긴 개인의 취향을 논하기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역치-월세든, 전세든, 자가든 실재하는 공간을 구해야 한다. 그 역치가 얼마나 높은지 설파하는 회의론자들에게, 개인이 경험한 집에 관련한 ‘노하우’나 ‘스토리’는 부재했다. 월세 시대니, 집 대신 차니 하는 토론을 듣고 있노라면, 실은 하나의 염원을,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애착'을 토로하는 것 같다. ‘집 대신 차’라는 말에도, 결국 차라는 공간의 염원이 담겨있는 게 아닌가.
누구나 나만의 공간을 염원한다
작은 책방이 인기다. 복고 열풍이나, 마니아들의 취향 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곳으로 발을 이끄는 것은, 작은 책방이 가진 이미지 자체이다. 생각을 읽고, 정리하며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는 모두 작은 공간에서 꿈을 꾸지 않았던가! 태초의 집에서 10개월 간 웅크린 본능 탓인지, 작고 어두운 곳에 웅크려 저마다의 우주를 만들었다. 학교가, 회사가, 사회가 정해준 계획을 짜는 책상이 아닌, 개인의 꿈을 짓는 ‘아지트’가 떠오르는 이런 공간들이 반갑다. 낭만적 공간이다.
이런 낭만적 공간의 중심에는 카페가 있다. 뭇 여성들의 로망을 다 모아둔 듯하지 않은가. 카페 관련 포스트는 맛보다는, 카페의 구조, 소품, 분위기를 상세히 풀어놓는다. 미각적 묘사보다 시각적 묘사가 용이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간 자체의 만족은 ‘쉼, 마심, 읽음’과 같은 일련의 행위와 별개로 큰 힘을 가진다. 카페처럼 꾸민 방의 인기 역시, 카페가 로망의 공간을 상징함이다.
나만의 공간, 그 안에는 저마다의 낭만이 깃든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일터에서 돌아온 주인공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호옴, 하고 한숨을 쉰다. 집을 의미하는 HOME의 발음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한, 혹은 하품을 하는 듯한 이 대목은, “집”이란 공간이 갖는 전인류적인 향수를 대변한다, 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작은 책방으로, 인기 카페로, 공간을 떠돌다 집 문을 열 때면, 이 장면이 떠오른다. 왠지 모를 안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얼마가 되었든, 집의 분위기가 얼마큼 내 만족을 채워주든, 실재 자체에서 찾아오는 안도감은 앞선 것들의 들뜬 만족을 뒤덮는다. 어쩌면 로망에 근사한 공간을 찾아 떠도는 마음은, 중2병 소녀처럼 갈팡질팡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책방이든, 내 방이든, 아지트를 여러 개로 쪼개 놓은 삶이면 어떠한가? 아지트를 찾아 떠도는 마음이, 진정한 호-옴(Home)을 찾아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