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수가 있다고
한국어나 영어의 관점으로 보자면, 우리가 사물의 수량을 인식하는 방식은 단수(Singular), 혹은 복수(Plural)이다. 'apple'은 단수이고 'apples'는 복수이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사과'는 단수이고 '사과들'은 복수이다. 더 논할게 없다.
그런데 말이다, 고대 인도어, 즉 산스크리트어에는 양수(Dual)가 있다. 일반적인 단수, 복수에 더해 둘을 의미하는 양수가 추가된다. 이는 산스크리트어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첫번째 당혹감이다. 가령,
1. 사람이 걸어간다. (단수)
2. 두 사람이 걸어간다. (양수)
3. 사람들이 걸어간다. (복수)
이렇게 세 종류의 격변화가 일어난다. 이런 격변화는 남성명사, 여성명사, 중성명사를 만남에 따라 달라지고 거기에 주격, 여격, 처격.. 등등에 따라 또 달라진다. 가히 '악마의 격조사 변화'라 부를 만하다. 동사는 또 동사대로 장난이 아니다. 산스크리트어 학습은 이론이고 문법이고 따질거 없이 저 격변화들만 줄창 외운다. 단어 하나가 남성, 여성, 중성, 단수, 양수, 복수 등등에 따라 수십가지로 변화한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암튼, 처음엔 저 양수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은 생각에 도저히 마음에 승복이 되질 않았다. 두 명의 브라만이면 그게 복수지, 양수는 굳이 뭐냐고~ (참고로, 현대 인도어에는 양수가 없다)
며칠전 우연히 테드 강연을 보는데 강연자가 이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고대 인도-유럽어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그의 주장의 요지는 이렇다.
우리 삶에서 'pair(짝)'로 된 사물이나 개념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해 보라. 우선 우리 몸이 대칭구조이고 많은 것들이 흑백, 음양, 좌우, 상하 앞뒤 하는 식으로 대칭이나 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건 엄연히 단수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 그래서 양수가 있는 것이다...
그의 강연은 논리적이고도 상식적이었다. 아아, 그러네, 과연 그렇구나. 그러니 단수도 아니고 복수도 아닌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겠네... 안경, 바지, 장갑, 등등, 아직도 많은 사물들이 대칭이나 짝을 이룬다. 이건 단수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다.(안경이나 바지는 영어로 복수로 표현되지만)
고대인들의 사유가 지금보다 훨씬 정교했다.
ps : 이 글을 쓰고 나서 자료를 찾아보니 단수, 복수외에 소수, 양수, 3수, 4수, 대복수 등을 표현하는 언어들이 있다. 인도네시아, 파푸아 뉴기니, 오세아니아, 오스트로네시아, 아프리카 등등에서 다양한 수사들이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