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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인간은 숨쉬는 존재라는 말처럼 하나마한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말과 '인간은 죽을 존재'라는 말을 비교해 보자. 두 언급은 같은 의미일까. 개나 말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결국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이고도 자명하다. 하지만 개나 말이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향한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나는 집을 향해 간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나는 집을 의식하고 있으며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리로 간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말도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고 있으며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그리로 간다는 뜻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개의 죽음과 사람의 죽음은 다르다. 짐승들도 도살되기 직전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어떤 영장류에게서는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행동이 관찰된다고 하지만 그것이 죽음을 '사유'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을까.
시간의 외길 위에서 죽음이라는 처소를 바라보며 그리로 걸어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외길이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고 그 걸음을 멈출 수도 없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죽지 않을 도리가 없는 존재...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시간, 혹은 존재라는 말은 객관중립적인 시간과 존재가 아닌 인간의 시간과 인간의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며 그 전제는 바로 인간의 죽음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표현했다.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계-내-존재'로 의식하는 존재이다.
모든 종교가 죽음의 의미를 묻고 극복하고자 노력할 테지만 과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또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들판에서 꽃 한송이가 피고 지는 것에도 다 의미가 있고 뜻이 있다고 믿는다면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들판에 꽃 한송이가 피고 지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과 죽음도 마찬가지 아닐까. 결국 존재의 의미가 있고 없고는 어딘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나라 주체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칸트철학의 핵심이 바로 이 '요청'에 있다. 우리에게는 도덕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요청되는 것이다.
소설가 김훈에 따르면 모든 죽음은 개별자들의, 각자의 죽음이다. 나는 나의 죽음을 죽고 너는 너의 죽음을 죽는다. 이 죽음과 그 죽음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결과야 동일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개별성은 각자의 것이다. 심지어 전쟁터에서 집단으로 죽는다해도 그 모든 죽음들은 개별적인 죽음일 뿐이다. 결국 그 개별성들은 낱낱이 말해질 수도 없고 포괄적으로 말해질 수도 없다. 죽음은 끝끝내 경험될 수 없다. 경험될 수 없는 것은 또한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한다. 지금 내가 중언부언 지껄이고 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