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너무 거창한가
배움의 본질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즐거움'이다. 동양적 사유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논어>의 첫 구절이 그렇게 시작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감탄사이면서 질문이기도 한 저 짤막한 선언은 자고로 학문이나 배움의 가치를 모든 것의 우위에 두는 동아시아적, 혹은 한국적 가치관의 바탕이 되었다. 뻔한 얘기다. 하지만 거기엔 또 커다란 난독(難讀)이나 오독(誤讀)이 있어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學.習.은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생존수단이었고 더 나아가 국가존립의 수단이었다. '자원 하나 없는 우리 나라가 살 길은...' 공부 밖에 없다, 공부해라, 그게 가난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이렇게 우리는 믿으며 달려왔다. 그 자체가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일제의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알거지가 된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많은 요인들이 있겠지만) 열성적인 교육열 덕분이었다고 누구나 인정하지 않는가. 과거제도라는, 서양에는 없었던 관료선발제도 때문에도 공부는 더더욱 중요했다.
하지만 문제도 거기에서 비롯한다. 개인과 국가가 가히 목숨을 걸었던 그 동아시아의, 혹은 한국의 교육에는 '즐거움'이 하나도 없었다. 무슨 한가하게 즐거움이냐, 밤을 밝혀 공부해서 나라를 일으켜야 하는 이 상황에서 한가하게 즐거움이라니...
그렇게 우리 모두는 구한말의 선각자들처럼 하루 빨리 영어를 익히고 수학을 익혀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개인의 영달도 마찬가지였다. 돈을 벌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니 한가하게 무슨 즐거움...
하지만 바로 그런 생각이 (우리를 물질적으로는 풍요하게 만들었을지 몰라도) 이 나라에 차고 넘치는 온갖 비극과 결과지상주의, 서열, 차별, 조급증의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의 과정으로서의 교육이 아나라 결과로서의 교육, 결과만 추구하는 교육 덕분에 이 나라가 여기까지왔고 이 모양이 되었다. 아닌가.
學.習.에 질식당하여 정작 저 문장의 핵심인 說은 철저하게 무시된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공부는 고통스러운 것, 그래도 해야만 하는 것... 왜 고통스러운데 해야만 하지? 성공하기 위해? 부국강병을 위해? 정말?
잠을 못잔 인간이 위태롭듯이 기쁨을 모르고 사는, 살아온 인간도 몹시 위태로운 것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 배움은 생존이나 부국강병의 수단이 아니다. 노동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즐거움일 따름이다.
'배우고 때 맞추어 그것을 익히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이 말에 무슨 대단한 형이상학이 숨어있는가. 노노노, 너무도 당연하고 뻔해서 하품이 나올 뿐이다. 기타를 처음 배운다고 생각해보자. 처음엔 손가락도 아프고 영 불편하다. 하지만 자신의 손끝에서 음이 흘러나오는 그 신기함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돌아서면 또 치고 싶어진다. 그렇지 않은가. 그게 바로 배움의 본질이다. 그러다가 싫증이나면 거기서 끝이다. 즐거움이 없는데 더 할 이유가 없다. 배움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공자는 말씀하신다. '배움은 그러해야 한다'가 아니다. '배움은 그러하다' 심지어 공자는 그것을 감탄조로, 혹은 되묻듯이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니?' (이 간단한 문장에 달린 주자의 주석이 즐거운 기분을 심각한 기분으로 돌려놓기는 하지만, 그래서 주자학이 비난받기도 하지만 그 얘기는 다음에...)
이렇게까지 말하면 너무 이상적인 생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린아이는 싫어도 학교에 가야하고 거기서 (올바른 개인과 시민이 되기 위한) 공부를 해야한다. 그건 꼭 즐겁지만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해야한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그게 사실일까. 싫어도 해야하는건가. 즐겁지 않아도? 학교에 가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야만인이 되는가. 학교와 배움은 동일한 것인가.
(근대적 국민국가와 의무교육, 숙련된 노동자=교육받은 사람, 국가의 통제, 감시, 평가... 이런 말을 하려다가 다 삭제함)
현실적으로 학교, 배움, 공부를 피하고 살기는 힘들 것이다. 싫어도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잊으면 안된다. 참된 배움은 원래 즐거운 것이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