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掌編)소설이랄까
우주정부가 추진하던 지구 인간멸종 계획이 누설된 후 지구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인간들은 하루아침에 완벽히 멸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실무를 담당하던 우주정부 부서의 우연한 실수로 계획이 노출되면서 지구인들이 그 사실을 알아버렸고 우주정부에 협조하던 지구정부는 즉각 저항을 선언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저항이 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게 마찬가지라면 무작정 넋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만도 없는거 아니냐고 각국 대표들이 아우성쳤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발언들의 이면에는 이 참에 지구정부 구성을 깨고 예전처럼 각국 체제로 돌아가 자기 나라라도 어떻게 살아보겠다는 나름의 계산들이 숨어있었다. 그리고 각국 대표들은 각자의 채널을 이용해 우주정부와 접촉에 나섰다.
하지만 우주정부는 계획을 바꾸거나 국가별로 선별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우주정부의 눈에는 모든 인간들과 그 국가들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문제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조용하고 신속하게, 한날 한시에 일제히 지구인들을 멸종시켜 나머지 환경을 보존한다는 계획에 금이 가면 안된다는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 같은 나라는 우주정부가 정 그렇게 나오면 멸종에 때맞추어 자국의 모든 핵무기와 핵시설을 파괴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섰다. 미국의 동참도 초읽기였다. 우주정부는 최악의 경우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씻어내는 비용과 시간을 계산했다.
핵자원을 가진 나라만 제외하고 멸종시키자는 주장이 우주정부 의회 내에서 있었지만 지도자에 의해 즉각 거부되었다.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따라서 선별적 협상 따위도 있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흩어졌던 각국 대표들은 新UN을 구성하여 다시 모이고 핵자원이 없는 국가들은 러시아나 미국 등에 연방형태로 스스로 귀속되어 안녕을 도모했다. 지구는 다시 핵무기를 가진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만 흐르고 우주정부는 결국 新UN과 협상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태는 오히려 역전되어 지구정부는 우주정부의 퇴거를 요청했다. 적어도 목성 궤도 밖으로 물러나줄 것을 지구정부는 요구했다. 우주정부 내에서는 이 기회에 아예 지구생명 모두를 멸종시키자는 강경론도 있었지만 현실론자들은 그렇게해서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를 얻어보았자 경제적 손해만 막심할 뿐이라고 대응했다.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가까운 다른 행성을 개척하는 것도 그리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우주정부는 일단 목성궤도 밖으로 물러났다. 지구의 모든 천문대와 우주감시체제는 목성 궤도 밖으로 물러난 우주정부 모선의 움직임과 변화를 관측하는데 촛점이 모아졌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터졌다. 시베리아에 배치된 러시아의 핵무기 하나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대기권 궤도로 발사되었고 이를 자동 감지한 미국의 대응 핵무기가 마찬가지로 대기권으로 발사되었다. 이후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흘러 중국과 파키스탄이 인도로 핵무기를 발사했고 동지나해역에서 작전중이던 미핵잠수함이 중국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했다. 지구는 초토화됐고 지구 생명체 대부분은 멸종했다.
후에 우주정부는 진상조사에 나섰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사는 곧 중지되었다. 이를 두고 호사가들은 여러 가설들을 펼쳤지만 무엇 하나 진실이 밝혀진 것은 없었다. 우주정부 모선은 태양계를 떠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ps : 더 후에 밝혀진 진실은 이렇다. 우주정부가 지구에서 철수할때 그들은 막 지구인들의 표준 DNA 샘플을 완성했고 인큐베이터 시설에서 배양 테스트도 성공했다. 그 생명의 씨앗을 뿌릴 후보지도 이미 선정된 상태였다. 차기 선거를 앞둔 지도자는 여러 상황을 감안해서 지구인들이 스스로 멸종한 것으로 하자는 참모진의 전략을 승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