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언제 당도하는가
손을 뻗어 닫힌 문을 여니 고향의 밀밭이 보였던가. 바람에 춤추듯 일렁이는 그 밀밭 사이로 아내와 아이가 웃고있었던가. 하지만 영웅은 고향에서 죽지 못한다.
패륜이 통치하는 미친 세상에서 죽음은 깃털처럼 가볍고 정의는 늦은 시각에 당도한다. 모든 희망이 꺼진 시간, 더 기다릴 것이 없는 시간, 너무 늦은 시간, 그리고 사랑은...
이 세상은, 그리고 다시 오지않을 이 사랑은 피묻은 복수를 삼키고야 물러날 것이다. 그래야 한없이 가벼워진 몸으로 고향에 갈 것이다. 이승에선 이룰 수 없던 것들이 하얗게 웃고있을 것이다.
2000년 가을에 나는 다시 초야로 돌아왔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초야의 저녁들은 헐거웠다. 내 적막은 아주 못 견딜만 하지는 않았다. 그 해 겨울은 추웠고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길들은 끊어졌고 인기척이 없었다. 얼어붙은 세상의 빙판 위로 똥차들이 마구 달렸다. 나는 무서워서 겨우내 대문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는 인간에 대한 모든 연민을 버리기로 했다. 연민을 버려야만 세상은 보일 듯 싶었다. 연민은 쉽게 버려지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나는 자주 아팠다.
눈이 녹은 뒤 충남 아산 현충사.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여러 번 갔었다. 거기에, 장군의 큰 칼이 걸려 있었다. 차가운 칼이었다. 혼자서 하루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 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
사랑은 불가능에 대한 사랑일 뿐이라고, 그 칼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영웅이 아닌 나는 쓸쓸해서 속으로 울었다. 이 가난한 글은 그 칼의 전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 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줄기 일자진(一字陣)으로 적을 맞으리.
다시, 만경강에 바친다.
김훈, <칼의 노래> 서문
내 시체를 이 쓰레기의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졸음이 입을 막아 입은 열리지 않았다. 나는 내 자연사에 안도했다. 바람결에 화약 연기 냄새가 끼쳐왔다. 이길 수 없는 졸음 속에서, 어린 면의 젖냄새와 내 젊은날 함경도 백두산 밑의 새벽 안개 냄새와 죽은 여진의 몸 냄새가 떠올랐다. 멀리서 임금의 해소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냄새들은 화약 연기에 비벼지면서 멀어져갔다. 함대가 관음포 내항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관음포는 보살의 포구인가. 배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마지막 고비를 넘기는 싸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선창 너머로 싸움은 문득 고요해 보였다.
세상의 끝이…… 이처럼…… 가볍고…… 또…… 고요할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 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 적들 쪽으로…….
<칼의 노래>,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