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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Oct 11. 2016

<명량>, 그리고 맹자

이순신 이야기 (3)

저녁 밥상을 들여온 아들 회가 말한다. 군사를 모두 육군에 돌려주고 낙향하자, 목숨을 거두려했던 임금인데 억울하지도 않은가.

회는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에서 돌아온 선조는 망가진 위신을 세우고 정치적 수습을 위해 삼남(三南)지방에서 임금보다 인기높은 이순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그런데도 싸워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회는 다그치듯 물었다.


장군은 대답한다. 그것은 바로 의리(義理)라고.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忠)을 쫓는 것이며 그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것,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다는 것. 그러자 회가 또 묻는다. 그 백성들은 자기 살길만 찾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장군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속으로 ' 본래 백성은 그런 것이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장군의 충은 임금 개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향하는 것이고, 그것은 백성이 곧 나라의 근본이라는 간결한 신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정치권력에 고개를 숙이는 대신 나라와 왕의 존재이유인 백성들, 그 백성들을 품은 조상 전래의 땅에 충성을 새겼다.

어진 군주라면 이런 신하를 좋아하겠지만 보통의 군주에게 이런 신하는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장군이 병든 두 어깨에 나라의 운명을 걸머지고 있는 동안 피난간 선조의 조정은 여전히 정치게임에 골몰했고 부패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때로 선조는 바다에서 싸우는 장군에게 종이를 구해서 바치라고도 했다. 장군은 종이를 구해서 바쳤다.


전쟁의 와중에도(아니 그럴수록) 필사적으로 중앙에 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는 것이 만연한 상황에서 장군은 오직 그날의 날씨와 전선의 동태, 적들의 향방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장군의 이런 정치중립적 태도는 중앙의 정치인들을 분노케했다. 장군은 어떤 뇌물도 통하지 않았고 어떤 뇌물도 보내오지 않았다.


전쟁의 선두에 있는 장군을 잡아다가 고문하고 계급장을 박탈하는 콩가루 조정이었지만 장군은 당대의 정치현실과 전쟁 후 재편될 질서에 대해 쓰다, 달다 말하지 않았다. 선조는 자신에게 군사적 보고 외에 그 쓰다, 달다를 말하지 않는 장군이 미웠고 두려웠다. 중앙의 정치와 바다의 적들, 모두가 장군을 향해 달려드는 아귀들 같았다.


그런 장군의 전략은 간결하고도 비장했다. 퇴로를 차단한 채 스스로를 사지의 회오리로 몰아넣는 것, 거기서 진실로 죽고자 하는 것. 하지만 그의 충이 향하는 지점의 백성들이 그를 그 사지에 내버려 두지않았다. 그것이 계산된 것인지 여부는 모른다.


영화의 끝부분, 아들 회가 묻는다. 울둘목의 회오리를 이용할 생각을 어떻게 했냐고. 그 질문은 아마도 장군이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을 때 백성들이 그를 구원하러 오리란 것을 계산한 것은 아닌가하는 물음일 수도 있다. 장군은 답한다. 그것은 천행(天幸 ; 하늘이 준 큰 행운)이었다고. 아들은 그것을 요행(僥倖 ; 뜻밖의 행운)으로 이해하고 그렇다면 자칫 낭패를 볼 수도 있지 않았겠냐고 묻는다. 그러자 장군은 백성들이 구원해 준 것이 천행이 아니면 무엇이 천행이냐고 되묻는다. 복되도다, 백성들이여.


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樂以天下, 憂以天下; 然而不王者, 未之有也。

임금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면 백성들 역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즐거워하며, 임금이 백성들의 근심을 걱정하면 백성들 역시 그 임금의 근심을 걱정한다. 즐거움을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며, 근심을 천하 사람들과 함께하면서도 왕 노릇을 하지 못한 이는 아직 있지 않다.

<맹자>, <양혜왕 장구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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