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대해 말이지
아마도 삶의 문제는 이 삶이 '딱 한번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연유할 것인데 삶이 딱 한번 주어진다는 말은 그러니까 연습이나 워밍업, 교환이나 리셋 이런게 불가능하다는 말이고 그래서 삶에서 빚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것, 태어남도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죽음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죽음은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남은 그 경험적 사실은 있었으나 의식에서 반추할 수 없다는 점에서 무내용하고 죽음은 그것을 반추하거나 기억할 수 없기 때문에 - 이미 죽어서 - 경험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문제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삶의 태도를 정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삶의 태도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는 알 도리가 없다.
살아계실때 이미 활불(活佛)로 추앙받았던 숭산 스님은 일평생 '오직 모를 뿐'을 말씀하셨다. 임종하실 때조차 "우리 모두는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간다..."고 말씀하셨다. 모르는 곳에서 와서 모르는 곳으로 돌아가는 그 잠깐의 틈바구니가 삶이라면 도대체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할까. 아니 그 질문 자체는 정당한가. 니코스 카잔스키는 어둠과 어둠의 틈바구니에서 잠깐 명멸하는게 삶이라고 말했다.
냉정하게 생각하자면 이 차갑고 천문학적인 진실만이 우리에게 강림한 가장 확실한 진실일 것이다.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이 던지는 빅 퀘스쳔 중의 하나는 "어떻게 아무것도 없음에서 무언가가 있음으로, 의식이 없음에서 의식이 있음으로가 가능해졌을까"이다.
모른다.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결과론적인 지식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왜 빅뱅이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시간과 공간조차 없던 그 상태(사실 '상태'라고 말 할 수도 없지만)가 어떻게 붕괴되고 원소들이 생겨나 지금의 우주가 되었는지, 빅뱅 이전이 어떠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빅뱅과 함께 우리의 우주적 시간이 생겨났으므로 '그 이전'이라는 말은 사실 성립할 수 없다. 빅뱅이 시간의 출발이므로 그 이전은 '없다'. 이 말은 언젠간 시간이 종말을 맞을 것이란 사실을 함축한다. 모든 시작은 끝을 향해 가는 것이므로. 우리 우주가 종말을 맞으면 우리의 시간도 함께 소멸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사람은 이 질문보다 "왜 살아야 하는가"가 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주장한다. 사실은 맞다. 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우문(愚問)에 가깝다. 그 질문은 "이 모든 것은 왜 존재하는가"의 변형된 질문인데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지는 숭산스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왜 살아야 하는가"는 "왜 죽지말아야 하는가"와 교환 가능한 질문인가. 그렇다면 답은 같을 것이다. 살야야할 이유가 없듯이 죽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살게되서 사는 것이고 죽게되면 죽을 것이다. 허공의 새가, 들의 백합이 다 그렇다. 사람은 유독 다른가.
결국 질문이 돌아왔다.
"어쩧게 살아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