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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Jan 17. 2017

국가의 이익, 국가의 정의

맹자까지 갈 것도 없다

맹자가 양혜왕을 찾아갔다. 왕은 맹자를 반기며 "오, 선생께서 우리나라를 멀다않으시고 오셨으니 우리나라에 이로운 일이 있겠군요?"라고 말한다. 당시는 국가와 국가가 서로를 집어삼키고 병탄하던 전쟁의 시대였고 합종연횡과 배신이 일상화된 폐륜의 시대였다. 이에 맹자같은 현인이 자기나라에 왔으니 부국강병의 고견을 기대하는건 왕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왕과의 첫대면에서 맹자의 대답은 싸늘했다.


"왕께서는 하필 이로움을 말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왕이 나라의 이익을 꾀하고 대부가 가문의 이익을 꾀하며 백성이 일신의 이익만을 꾀하여 서로 다툰다면 나라는 위태로와질 것입니다... 의를 뒤로 미루고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모든 것을 빼앗지않으면 만족을 모를 것입니다... '인의'가 있을 뿐인데 왕께서는 어찌 이익을 말하십니까"


이 드라마틱한 에피소드는 <맹자>라는 책의 첫 장을 열면 펼쳐진다. 과연 맹자 사상의 에센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챕터를 <하필왈리 : 하필 이익을 말하느냐> 장이라고도 부른다. <논어>가 부드럽고 온화한 톤으로, 시적인 목소리로 인과 예를 말한다면 <맹자>는 변호사가 변론하듯 논리적이고 냉정한 어투로 의를 말한다.


그러나 맹자의 이런 까칠함은 오랫동안 동아시아의 역대 왕들에게 불편한, 그리고 피하고픈 가르침이었다. 심지어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라의 이익'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이다. 하지만 맹자는 이익보다는 정의가 우선이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런가. 국익보다 더 중요한게 있는건가.


"재벌 총수를 구속하면 국가 경제에 미칠 영향이..."

"정의도 좋고 다 좋지만 국가경제를 흔드는 일은 좀..."


저 단순하고, 틀렸으며, 부당한 주장들을 논파하기 위해서는 사실 고매한 맹자까지도 필요없다.


재벌 총수를 구속하면 국가경제가 영향을 받는다.


저 주장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것은 재벌 총수의 기업지배가 과도하다는 뜻이고 그 기업이 국가경제를 독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구조는 비정상적이고 기형적이다. 기업은, 국가의 경제는 그렇게 굴러가서는 안된다. 너무도 뻔한 얘기고 경제나 경영에 무지한 나도 안다. 근데 경제신문에서 엘리트 기자라는 것들이 저런 말들을 태연히 지껄인다. 요지는 국가의 이익을 저해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뇌물로 구축된 이익이 진실로 국가를 부강하게 할까. 그 기업의 이익이 정말 국가의 이익으로, 국민들의 이익으로 돌아오는건가. 아니면 그들만의, 더 정확히는 그 개인들만의 이익은 아니었나.


기업이 국가에 공헌하는 길은 고용창출과 세금이다. 무슨 사회사업이니, 기부니 하는건 옵션이다. 그들이 과거에 증여세를 피하려고 무슨 짓을 했는지, 지금 국민연금을 얼마나 손해보게했는지를 생각해본다면 과연 누가 이익을 보았단 말인가. 정의는 고사하고 이익의 측면에서도 정말 국가는, 국민은 이익을 보았는가. 정경유착은 기업에도 손해고 국가에도 손해다. 그 짓을 벌이는 개인들만 부당한 이익을 볼 뿐이다. 그게 전부다. 모르지, 헛소리를 지껄이는 기자도 이익을 봤는지.


미안하지만 ㅂㄱㅎ가 없어도 대한민국은 굴러간다. 그래야 한다. 마찬가지로 ㅇㅈㅇ이 없어도 그 기업은 멀쩡히 굴러가야한다. 그들이 없다고 문제가 생긴다면 그게 바로 문제다.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근본적 원칙 하나는 인간은 불완전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철학적 믿음이다. 그로부터 대의주의, 법치주의 등등이 나온다.


사실 이익이 앞선다, 정의가 앞선다는 논쟁 자체도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정의와 진정한 이익은 서로 배척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의와 이익 중 한가지만을 구해야 한다면 그것은 정의다. 그것이 <맹자>의 요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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