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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Apr 05. 2017

<Gravity>

이 삶을 당기는 힘은 무엇인가

1.

"인간의 삶을 추동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별적 인간들이 하루하루 잊지 않고 삶을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훈은 거기에 대답하는 대신 원양을 건너온 도요새의 무리가 갯가에 내려앉아 갯벌을 쑤시며 먹이를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반문한다. ‘저것들은 왜 사는가? 저것들을 살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


낙원이나 지옥의 소재를 알지 못하는 우리의 삶은 꼭 살아내야 할 어떤 필연성에 매여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 끝장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요컨대 우리는 딱히 살고 싶다거나 딱히 죽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시시각각 스쳐가는 삶의 욕구와 죽음의 충동 사이에서 스스로 살게 만드는 ‘어떤 힘’에 등떠밀려 하루하루를 견딜 뿐이다. 그 힘은 아마도 물리적 설명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삶 자체가 스스로 삶이기를 희구하는 모종의 현상일 것이다..."


- browne -


2.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죽지 못해 산다고 한다. 미국사람들도 그런지 모르겠다. <그래비티>의 설정이 그렇다. 대기권 밖, 지구가 웅장하게 내려다 보이는 '가까운 우주공간'에서 허블망원경 수리임무를 띤 닥터 라이언도 사고로 딸을 잃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삶을 산다. 일할 때는 그냥 일만하고 운전할 때는 그냥 운전만한다. 그 외는 생각이 없다. 허블망원경을 수리할 때도 농담 한마디 안하는 것을 보면 그녀는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도 그냥 멍하게 있을 것이다.


그런 닥터 라이언은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살면서 왜 죽음은 피하려할까. 왜 삶을 놓을만한 상황에서 악착같이 안 놓으려 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건 너무도 뻔한 얘기다. 그저 '우리 모두는 죽기 싫어한다.' 당연하지않나. 그러니 닥터 라이언이 살려고 애쓰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래도 왜? 왜 그녀는 살려고 애쓰냐고? 살아봤자 좋은 것도 없는데.


3.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지구'는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 토대라고 말했다. 화성 식민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지금에야 시시하게 느껴질수도 있지만 그녀가 저 말을 한 1958년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미래에 화성 식민지가 개척된다해도 그곳에서의 삶은 또다른, 혹은 제2의 지구적 삶이 될 것이기 때문에 지구는 여전히 인간 존재의 가장 근본이다.


중력은 그 지구와 인간을 묶어준다. 그것은 끈과 같다. 중력이라는 끈이 없다면 대기는 진작에 우주공간으로 달아났을 것이고 그러면 지구상에는 생명도 없었을 것이다. 바람불고 꽃이 피는 일 따위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지구를 말할 때 그것은 중력이 있고 그 덕분에 대기가 존재하는 지구를 의미한다.

나를 (이 삶으로) 당기는 힘, 그 힘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다. 삶에서 노동을 떨칠 수 없듯이 중력도 떨칠 수 없는 것이고 그 필연들이 곧 인간의 조건이라고 아렌트는 말했다.


4.

하지만 이 삶을 삶으로 잡아당기는게 단지 중력 뿐이라면, 그걸로 설명이 충분하다면 인간, 꽃, 개는 다 동격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 인간과 꽃과 개는 중력에 붙들린 채 생명을 생명으로 보존하려한다는 차원에서는 동격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진화생물학자들이나 영장류학자들, 혹은 포유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 일부 동물들도 도덕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수도 있지만 어쨌든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독특한 특징은 '도덕'(이라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꽃에게는 오직 물리법칙만이 강림하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에 더해 도덕법칙이 존재한다.('도덕이 법칙인가'하고 물을 수 있지만 그건 법칙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 글의 주제와는 동떨어진다.)


5.

위의 언급이 타당하다면 인간을 잡아당기는 힘은 물리법칙, 그리고 도덕법칙으로부터 온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늘엔 빛나는 별이 있고 내 마음속엔 도덕율이 있다고 말한 칸트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 두 힘들은 분석하면 식욕, 성욕, 수면욕(물리법칙), 사단칠정(도덕법칙) 등으로 구분되는데 저 사단칠정 하나가 조선조 철학논쟁의 주제였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번뇌 하나만도 108가지로 분석하고 있다. 이 커다란 두 힘들의 상호작용 - 나의 몸과 마음을 서로 당기고 밀치는 그 힘들의 작용이 곧 '나'이고 내 삶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왜 생명은 생명에 머물려 하는지는. '생명의 가장 커다란 속성은 그 존재함 자체에 계속 머무르려는 것이다'라는 말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란 말처럼 싱겁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젠가 최초의 생명이 계속 생명 자체에 머무르려고 결심하지 않았었다면, 그래서 자기로 생명을 끝내기로 작정했었다면 생명은 더이상 없었을 것이고 이런 시시한 말들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란 사실이다.


딱히 살 이유도 없지만 딱히 죽을 이유도 없는 이 삶에서 그래도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은 태초의 생명을 붙잡았던 그 힘, 그래서 생명이 스스로 생명이기를 희구하는 그 현상이다.

중력은 죽을 때까지 벗을 수 없는 멍에지만 그 멍에가 아니라면 삶도 없다. 나를 붙드는 것이 나를 살게도 하는 힘이다. 나는 어떤 힘에 붙들려 있는가. 나를 이 삶에 결박시키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천신만고 끝에 지구로 돌아온 닥터 라이언이 새로운 인간이 되어 이전과 다른 충만한 삶을 살게 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깨달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그 곳에, 그 자리에 원래 있었고 본디 그러했다.'


그래서 닥터 라이언은 이렇게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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