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삶
1. 프롤로그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사고(thought)의 한계는 곧 언어의 한계이고 세계의 한계이며 논리의 한계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사고와 언어, 세계와 논리는 같은 볼륨(volume)을 지닌다는 뜻이다. '볼륨'이라는 표현이 애매해 보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뜻이 모두 포섭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우리는 말하는 정도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인식한 정도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말하는 세계는 좁고 현자가 말하는 세계는 넓을 것이다. 지구에서는 지구의 말을 하고 목성에서는 목성의 말을 할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밖, 언어의 밖을 모른다. 그 '밖'은 사유와 논리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전혀 접점이나 공통점이 없는 두 세계가 충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영화 <Arrival>은 일차적으로는 외계인과 지구인 언어학자의 언어적 소통의 문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표피를 걷어내면 거기엔 시간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 더 들어가면 사랑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있다. 미리 말하자면 언어는 시간의 본성에 기대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은 삶이 시작되고 춤추다가 사라지는 무대라는 것, 그 춤의 주제는 사랑이라는 것...
2. 언어
지구의 언어는 어떤 모습일까. 이 세상의 수많은 언어들은 모두 주어(S), 술어(V), 목적어(O)의 구성요소를 가지며 그것들은 시간적 선후관계로 결합된다. 예컨데 영어와 중국어는 SVO(I love You)구조이고 한국어나 일본어는 SOV(나는 너를 사랑한다) 구조이다. 이 두가지 유형이 지구상 언어의 86.6%를 차지한다(고 내가 참조한 언어학 책에는 씌여있다). 나머지는 VSO, VOS, OVS 순서로 빈도를 가진다. OSV 구조의 언어는 없단다.
이런 다양한 언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시간적 배열'이다. 주술목 구조이든 주목술 구조이든 언어는 시간의 순서 위에 놓인다. 주어가 먼저 발화된 후 술어가 발화되어야 하는 것이 지구 언어의 운명이다. 품사에 따라 순서가 정해져 있는 언어도 있지만 중국어처럼 순서에 따라 품사가 정해지는 언어도 있다. 어쨌든 지구의 언어는 '품사의 시간적 배열'에 다름 아니다. 이는 언어를 모사(copy)하는 텍스트에 있어서도 동일하다. 왼쪽에서 시작하든 오른쪽에서 시작하든, 혹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든 텍스트 역시 시간의 순서, 즉 발화의 순서를 따라서 기록된다.
하지만 우주 저편에서 거대한 홍합 모양의 물체를 타고 온 외계인들의 언어도 우리와 동일할까. 그들의 언어도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 즉 선형적(linear) 구조를 지녔을까. 대답은 '아니다'.
외계인들의 언어는 주술목, 주목술, 술목주 등등의 구조를 지니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텍스트로 나타낸 모습은 아래와 같다.
만약 저 텍스트를 읽는데 동그라미가 시작되는 지점(왼쪽 아래)에서 시작하여 빙돌아 오른쪽으로 그림(언어)의 궤적을 쫓아가며 시간적/공간적 순서로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명백히 인간적 습관일 따름이다. 저 그림으로 표현되는 외계인의 언어에는 시간의 순서가 없고 주술목의 구조가 없다. 저 그림은 그냥 하나의 덩어리다. 주어, 술어, 목적어로 센텐스를 분해하고 그것들을 시간의 순서로 배열하려는 노력으로는 저 언어는 이해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고와 인식은 한계에 닿는다. 주어, 술어, 목적어라는 요소로 분해되고 그것들이 시간 순서로 나열되는 지구의 언어체계, 그런 사고체계를 지닌 우리는 그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언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초음파로 소통한다는 박쥐들의 언어를 상상할 수 없듯이 말이다.
내가 밥을 먹고 있는 사태를 '나는 밥을 먹는다'의 텍스트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애니메이션이나 도화지에 그린 그림이 아니고 말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거대한 돌들에 새긴 그림들조차 시간의 순서를 지닌 주어-술어의 체계였다.
언어의 번역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지구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비선형성은 선형성으로 바뀌고 외계인 언어의 가장 핵심적 특질은 사라진다. 한 언어의 본질적인 이해가 번역이나 통역을 통하여는 획득될 수 없다면 결국 내가 그 언어 속으로 들어가야 할까. 여기까지가 이 영화를 보는 언어적 측면의 일차적 층위이다.
3. 시간
언어학자 루이스는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즉 그들의 언어가 무시간적(혹은 비선형적) 특성을 가졌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지구의 언어를 구사하던 그녀의 사고체계(뇌배열) 또한 무시간성을 띠게 되고 '과거-현재-미래'의 선형적 구조가 해체되는 경험을 한다. 이는 마치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던 화자가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적 사고체계를 가지게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그런 한국어, 영어 사고체계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뭔지는 모르겠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배워서 뇌배열이 바뀐다는 설정은 지나치다는 평을 어디서 본적이 있는데 그렇게 접근하자면 영화 자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이다)
인간에게 닥치는 시간의 본질은 선형적이고 비가역적이며 삶은 그 바탕 위에서 영위되는 것이다. 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현재'이다. 오직 '현재'에만 우리는 존재한다. 아무리 과거와 미래를 사유한다해도 그것은 결국 현재에 벌어지는 일이다. 과거도 현재이고 미래도 현재이다. 그럼에도 그 현재는 보이지않고 잡히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현재를 떠나지 못하면서 막상 그 현재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일종의 신비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가득(不可得)이라고 한다. "그게 어디 있느냐" 철학자 마크 롤랜드는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오염되어 있다고도 말했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시간의 본질(선형적이고 비가역적이란 개념)은 편의적이고 비본질적이다. 우리는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니, 알지 못한다. 시간의 본질을 알려면 그것을 벗어나서 관찰해야 하는데 시간을 벗어나 시간을 관찰할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는 시간을 '통해서' 존재할 뿐이지 시간에 '대해서' 존재하거나 그것을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다. 마치 우리가 빛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지 빛 자체는 볼 수 없는 것처럼.
언어학자 루이스는 선형적 구조를 지니지 않은, 그래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중첩되어 현전하는 외계인의 언어를 익히면서 그 자신도 과거, 현재, 미래로 틀지워진 지구적 시간체계가 붕괴됨을 경험한다. 이제 그녀에게 과거, 현재, 미래는 구분되지 않는다. (이 영화 자체도 시간에 대한 관객의 일반적 믿음을 뒤집는 방식으로 연출된다.) 마치 피카소가 3차원의 풍경을 2차원에 구겨넣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외계인들은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의 체계에서 살며 언어도 그런 방식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4. 사랑
이제 루이스는 미래를 보게 된다. 그녀는 현재와 미래를 동시적 사태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외계인들이 지구인들에게 주고자 했던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 선물은 우리에게 거대한 물음을 앞세운다.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현재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는 '내일의 주식 가격을 알면 오늘 어떤 주식을 살까' 하는 문제와는 다르다.
니체는 물었다. '다시 살아도 이번 삶과 똑같이 살고 싶은 삶을 살고 있는가'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그런 삶을 감내하는 것이 초인(Übermensch)이고 이 세계는 그 질문으로 영원히 회귀한다. 시간은 늘 새롭게 다가오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늘 반복되기를 희구할만한 삶을 살고 있는가.
누군가에 대한, 혹은 무엇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이 일회적인 삶을 다시 살고, (비록 비극으로 끝난다 해도) 미래에 대한 소망을 품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이 영화 <arrival>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시간에 속박된 언어의 층위를 넘어 무시간성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진정 시공간의 굴레를 넘어설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싶을까. 혹은 할 수 있을까.
5. 에필로그
그러므로 이 영화가 추구하는 것처럼 보였던 질문 "그들의 방문 목적은 무엇인가"는 보기에 따라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핵심적인 것은 그들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이다. 세계각국이 협력해야만 외계인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메시지도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음악은 화면처럼 몽환적이고 어둡다. 북유럽 냄새가 나는듯하여 찾아보니 작곡자가 아이슬란드 사람이다. 왜 한국 개봉 제목을 <컨택트>라고 했는지는 이해가 안된다. 칼 세이건 원작의 저 위대한 <컨텍트>가 이미 있는데 왜? 왜?
여자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닮았고 고양이는 개보다 철학적이다. 무슨 말이냐고.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를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젊은 시절엔 4차원 소녀처럼 깜찍발랄했다면 지금은 사려깊게 나이든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연기가 말이다.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도 연상된다. <그래비티> 얘기는 다음에. 영화를 보고 나니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얼핏 떠올랐다. 나만 그랬나? 그 얘기도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