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아버지의 사촌
1.
"시골의 XX형님이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전화를 하셨다. 어스름한 새벽의 비몽사몽간에 '아버지에게 무슨 형님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니 말로만 듣던 아버지 큰댁의 사촌 형님이었다.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로 향했다. 왕복 거의 800km의 거리였다.
2.
고향에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을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살짝 들뜨셨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경남 창선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형제가 세 분이고 그 형제들의 자녀들, 즉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그리고 사촌들이 한 마을에서 다 태어나고 올망졸망 자랐다(고한다).
뒷좌석에 앉으신 작은 아버지께서 사태를 좀 더 쉽게 설명해 주신답시고 운전하는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시며 "그러니까 느그(너의) 할아버지의 형의 큰 아들, 그 양반이 어제 돌아가신거 아이가" 고 말씀하실때 내 머릿속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3.
"아이고, 이기 누꼬? XX아재 아인교?"
저녁이 되어 도착한 상가에는 그 옛날 아버지와 같이 태어나고 자란 사촌들과 그 권속들이 그득했다. 머리가 허연 노인들이 아버지에게 와서 문안했고 좀 더 젊은 장년들은 수줍게 다가와 자신의 관등성명을 밝히며 아버지에게 인사했다. '큰 형님'이 돌아가신 덕분에 아버지는 집안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어른이 되었다.
나는 대부분 처음보는 육촌들과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포즈로 인사를 나누었다. 항렬과 촌수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했다.
수십년의 세월이 그토록 가벼울 수 있는지 몰랐다. 아버지와 사촌들은 엇그제 헤어진 사람들처럼 재잘댔다. 그들은 웃다가 울었고 긴 한숨과 장탄식을 연발했으며 다시금 웃었다. 아버지는 그 마을에서 사신 날들보다 훨씬 많은, 아니 대부분의 날들을 서울에서 사셨지만 서부 경남 특유의 억양과 악센트는 현지인들과 완벽한 싱크를 이루었다. 나를 등에 업고 서울에 올라오신 아버지는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단 한마디도 서울말을 배우지 않았고 쓰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을 당신들의 풍습과 서울 사람들의 풍습을 구분하며 사셨다.
아기때부터 그 억양과 악센트를 듣고 자란 탓으로 나는 지금도 부산, 대구쪽 사투리와 남해, 통영쪽 사투리의 차이를 완벽히 구분할 수 있다.
4.
아버지가 태어난 바닷가 마을은 고즈넉했다. 아침에 닭이 울었고 버스가 조용히 지나갔다. 해무가 뒤덮은 바다를 보다가 문득, 난중일기를 뒤져보면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언제 이곳 앞바다를 통과한 기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년의 세월을 건너 혈족들을 불러들이는 힘은 무엇일까. 처음보는 육촌들과도 몇 방울의 피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왜 그토록 몸서리쳐질까. 바람에서 태어나 허공을 떠돌다가 바람으로 돌아가는 새들은 노제(路祭)를 어디서 지내는 것일까.
남녘에는 이미 봄이 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