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정
이 세상이 점점 나아지기를 희망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세상이 나아질거라는 믿음이 없다. 그런 믿음을 가질만한 지속적이고도 뚜렷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일종의 비관주의자다.(그렇다고 이 세상이 딱히 나빠지고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나는 얼치기 비관주의자다.)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 나는 내 당대의 어떠한 가치도 긍정할 수 없었다. 제군들은 희망의 힘으로 살아 있는가. 그대들과 나누어 가질 희망이나 믿음이 나에게는 없다. 그러므로 그대들과 나는 영원한 남으로서 서로 복되다. 나는 나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서 살 것이다."
김훈, <칼의 노래> 서문
그저 바란다면 남은 내 삶이 평온, 무사하길 빌 뿐이다.
그래서, 나는 심상정이 대통령이 되기를 희망한다. 내 삶이 평온 무사하고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사는 사람들, 작은 회사의 구성원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 동물들이 조금이라도 생명의 가치를 존중받는 세상, 돈있고 힘센 사람이나 돈없고 힘없는 사람이나 모두 공평하게 법의 지배를 받는 세상, 나같은 사람이 정치에 무심해도 되는 세상...
간혹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번엔 정말 꼭 정권교체 해야하는데 그렇게 표가 분산되면...' 물론 좋지 않다. 그러니 심상정을 '우리쪽' 단일 후보로 정하자. 어때, 됐지?
'정권교체'라는 말은 진실을 호도하거나 은폐시키는 측면이 있다. ㅂㄱㅎ 같은 사람의 예를 보듯이 정권교체가 중요한게 아니다. 또 그게 목적이 되어서도 안된다. 문제는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이다.
나는 지금의 시대적 요청은 심상정이라고 생각한다. 딸의 몰락과 함께 그 아버지로 상징되던 근대화 패러다임은 이미 수명을 다했고 두 번의 집권으로 드러난 민주화 세력의 한계도 목전에 당도했다.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은 같이 링에서 주먹을 교환했던 일종의 적대적 파트너라는 점에서 상반되면서도 공통된 속성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민주화 세력의 일부인 심상정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아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다.
근대화-민주화 세력의 정책과 인물은 자칫하면 구분되지 않는다. 적대적 공생이 그들을 수렴시켰기 때문이다. 일부 극단적인 성향들을 제외하면 그들은 생각도, 행동도 다 비슷하다. 다만 입장의 차이 때문에 드러나는 모습이 다를 뿐이다. 그게 나쁘다는게 아니다. 이젠 한계에 왔다는 것이다.
심상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