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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y 10. 2017

유승민을 생각함

질 것을 알면서도 싸웠다

역사의 가정이란 늘 부질없지만 이런 가정을 해보자. 만약 ㅂㄱㅎ(모음까지 붙여가며 거명하기 싫다)가 그런 역사적, 민족사적 사고를 안치고 무사히 임기를 마쳤다면, 그래서 새누리당 조직이 온전하고 그 힘으로 유승민이 대통령 후보로 나와 문재인과 붙었다면...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그래도 문재인이 대통령이 될거라고. 그런 면에서 ㅂㄱㅎ를 가장 원망해도 좋을 사람은 유승민일 것이다.


그가 2015년 4월, 여당 원내대표로 취임하고 행한 국회연설은 야당에서조차 아낌없는 갈채를 보낼만큼 명연설이었다. 본인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연설문은 복지, 세월호, 고통받는 서민, 노무현, 성장과 분배의 균형 등의 키워드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동안 그 어떤 여당 지도자의 입에서도 나온 적 없던 말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이며 따라서 ㅂㄱㅎ의 공약은 지켜 질 수 없다'고 천명했다. 그의 연설은 솔직했고 따뜻했다. 연설 후 야당의 논평은 귀를 의심케 할만큼 호의적이었다. 가히 보수의 혁신이 목전에 당도한 듯했다.


그러나 그의 연설은 참담한 후폭풍을 불러왔다. 그의 연설이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판단한 ㅂㄱㅎ는 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보복을 했다. 대통령이고 뭐고, 정당의 원내대표고 뭐고 없었다. 당대표인 김무성조차 그를 도울 수 없었다. 그리고 보복의 정점을 찍은 공천파동. 그들은 정치인은 커녕 인간도 아닌 집단이었다. 야쿠자조차 그렇게 천박하고 비열하게 조직원을 내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유승민은 살아왔다. (김무성이, 이한구가 저지른 '비박세력 학살공천'을 비판하며 자신의 대표 직인을 가지고 부산으로 튀었고 공천장 날인 거부 몽니를 부린 끝에 결국 유승민을 찍어낸 대구 동구을(이던가?)에 대한 새누리당 공천은 없었으며 - 원래 거기는 ㅂㄱㅎ 똘마니를 공천할 예정이었는데 - 그 결과 무소속 유승민이 당선되었다.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 이런 영화를 찍고 있는 이 나라가 이렇게 굴러가는 것도 일종의 기적이다.)


그럼에도 그는 ㅂㄱㅎ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이지메한 인간들에 대해 그 어떤 원망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런 젠틀하고 고결한 품성만으로도 그는 틀림없는 대통령감이었다. 유시민은 그를 두고 '저쪽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더불어 이야기가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미친 X이 저지른 사상초유의 헌법파괴 사태가 드러났다. 광화문 광장은 불타올랐고 새누리당은 공중분해되어 마땅한 처지가 되었다. 여권의 대권주자들 누가, 그 어떤 꿈을 꾸었든 다 개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건 나라가 아니었고 그들은 더 이상 통치집단이 아니었다.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승산이 없음을 알면서도 도전한 그의 심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남자에게는 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피하면 안되는 싸움이 있기도 한 것인가. 차기를 염두에 두는 정치공학적 그림을 그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모르겠다. 그는 중언부언하지 않았고 구걸하지 않았고 낙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패배했다. 어느 일간지는 '패배지만 승리'라는 쓸쓸한 논평을 했다. '패배지만 승리'는 유승민과 심상정, 딱 두 사람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는 기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전국적으로 고르게 득표는 했죠. 낮게..."

나는 비록 다른 후보를 찍었지만(내가 누굴 찍었는지는 아래 몇몇 글들을 보면 안다) 이번처럼 표가 한장인 것이 아쉬운 적도 없었다.


광장의 힘이 승리한 사실은 기쁘지만 ㅎㅈㅍ같은 인간들이 득세할 정치풍토는 우울하다. 갈길은 여전히 멀어보이고 희망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그래서 더더욱 유승민의 저조한 성적이 아프다. 아, 모든 날들이 좋았지만 모든게 다 좋지는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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