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추구한 친구들인가
<논어>에 '無友不如己者무우불여기자' 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을 많은 번역서들은 '나만 못하면 친구삼지 말라'로 번역한다. 하지만 이 말은 심각한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주자가 <논어>의 주석을 달았던 송대(宋代)에 이미 '다들 자기보다 잘난 사람하고만 친구를 하려하면 누가 친구를 맺을 수 있겠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긴 논의는 생략하고, 저 구절은 '뜻이 자기와 같지 않으면 친구삼지 말라'고 해석해야 올바른 해석이다. 그것이 글자의 원래 뜻과도 부합하고 공자의 정신과도 맞는다. 어차피 사람은 끼리끼리 모인다. 그 끼리끼리 모이게 하는 것은 결국 뜻이다. 뜻맞는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는거 아닌가. 나는 공부하는데 뜻이 있고 저 녀석은 노는데 뜻이 있다면 저 녀석과 나는 친구가 되기 힘든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고 심오할 것도 없다.
한국 현대사의 중심에 두 친구 사이가 있다. 한쪽(전-노)은 정치군인으로 승승장구하며 요직을 서로 주고 받다가 대통령 자리까지 주고받았고 결국엔 같이 감옥에 다녀오는 것으로 끝났다. 또 한쪽(노-문)은 앞의 친구 사이와 대척점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그 정반대의 삶이 그들을 또 대통령으로 이끌었다.
두 친구 사이가 지향하는 가치들은 전혀 달랐다. 한쪽은 출세였고, 그래서 그들은 출세의 최정점까지 갔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런 가치가 없었다. 오직 피묻은 권좌 뿐. 노동과 인권에 관심을 가졌던 노-문은 아무런 출세를 지향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엔 고결한 가치가 있었다. 그들은 '지향하지 않음'으로 나아갔다. 그래서 그들의 대통령Presidency은 출세가 아니다.
'친구를 잘 사귀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문제는 친구가 아니라 '나'다. 나는 어떤 가치를 품고 사는가. 나는 어떤 인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