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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Apr 07. 2018

잘가라, 까뮈

끝, 끝, 끝...

1.

까뮈는 13년을 살고 죽었다.


어미 젖을 떼고 바로 우리집에 왔을때 녀석은 손수건 한장으로 몸뚱아리가 다 덮였다. 미니핀 특유의 올블랙이라 '까미'라고 부를까 하다가 너무 흔할거 같아서 비슷한 발음의 '까뮈'로 이름을 정했다. 까뮈의 13년은 물론, 삶에 내장된 부조리와 무의미를 말한 알베르트 까뮈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녀석에게 닥친 실존적 문제란 하루하루 먹고, 싸고, 잠자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엔 부조리도 없고 시지프스적인 무의미도 없었다. 불임수술을 당해서 여자도 한번 만나지 못했고 그래서 후손도 남기지 않았다.

녀석은 무엇 하나 걸치지 않았고 소유하지 않았으며 계획을 가지지도, 추억을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욕망은 단순하고 뚜렷했으며 지속적이었다. 녀석에게 있어 시간은 늘 신생(新生)이어서 어제를 반추하거나 내일을 사유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요컨데 녀석의 삶은 '지금 당장'과 '맨 몸뚱이 하나'가 전부였다. 그게 다다. 그 이상 녀석의 행장을 채울 내용은 없다. 그걸 굳이 묘비명에 쓰라면 "여기 잠든 까뮈는 먹고, 싸고, 잠자고, 기뻐하고, 슬퍼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병을 알았을 땐 더 손을 쓸 수 없었다. 녀석은 하루를 꼬박 굶고 누워서 숨을 몰아쉬더니 새벽 1시에 발작을 몇 번 일으킨 후 숨을 멈추었다. 숨이 멎자 입과 항문이 풀리며 체액이 흘러 나왔다.


경련을 일으키며 가쁘게 숨이 잦아들 때 거기에 타인이 개입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가슴을 주물렀지만 동공이 풀린 까뮈의 눈은 그 무엇도 응시하지 않았다. 살아서는 대부분을 사람에 의존했지만 배우지도 않은 죽음만은 철저히 자신이 수행했다. 누구도 자신의 죽음은 자신이 아니면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죽음의 마지막 능선을 힘겹게 오르는 그의 모습은 장엄하고도 눈물겨웠다. 그리고 배수구로 물이 빨려나가듯 삶이 일시에 물러나자 까뮈의 몸은 고요해졌다. 그 마지막 순간, 까뮈의 몸에 군림하던 죽음과 삶은 선명하고도 모호했으며 물리법칙은 흔들리지 않았다.


삶에 벼락처럼 죽음이 닥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죽음이 깃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어서 자기들끼리 가는 어디가 있는지, 남들이 말하듯 어딘가에 먼저 가서 나중에 올 주인을 기다리는지 여부도 유물론자이자 경험주의자인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우리가 살아서 맺었던 인연은 이제 끝났다는 것, 그리고 그게 다시 반복될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2.

애견 화장터는 조촐했다. 30분 만에 까뮈의 사체는 세 스푼 정도의 분량으로 수습되었다. 화로에서 나온 한 줌의 뼈들을 직원이 쇠절구에 넣고 콩콩콩 빻았다. 그간 이곳을 거쳐간 온갖 개들이 저 쇠절구에서 대동단결을 이루는구나 싶었다. 유골함은 250ml 쯤 돼보였다. 손바닥에 올라가는 앙증맞은 사이즈였다. 화장을 진행했던 직원이 유골함을 보자기에 싸서 건네주는 것으로 까뮈의 1일 장은 끝났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꽃들이 비에 젖었다. 


저 세 스푼이 살아서는 밥을 달라고 떼를 쓰고 산책을 나갈때는 좋아서 깡총거렸다는 사실은 먼 풍문처럼 믿기 어려웠다. 이 흰가루는 본래 무엇이었고 이제 또 무엇이 되는건가. 축생과 인간의 몸을 받기 전, 너와 나는 어디에 있었고 이후는 어디로 가는가. 왜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인가. 왜 아무 것도 없음에서 삶이 오고, 왜 다시 아무 것도 없음으로 돌아가는가.


돌아온 집은 고요했다. 라면을 끓여먹고 잠이 들었다. 이틀이 지나고 몸살이 왔다.


나는 계속 산다.


잘가라, 까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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