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식
수구레국밥집에서
술국을 먹다가 창우가 묻는다
형님, 시는 어떻게 옵니까
그러니까 창우야
시는 오늘 같은 밤
우리 같은 사람들 때문에
잠도 못 자는 국자처럼 온다
냄비에 기대 쪽잠을 자던 국자가
졸린 눈 비비면서 아무 말 없이
식은 술국을 덜어줄 때처럼
가만히 온다
있는 둥 없는 둥 한마디도 없이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이야기를
몇 시간 째 들어주는 국자처럼 온다
김국자씨처럼, 박국자씨처럼
곁에서 동그랗게 무릎을 끌어안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리디여린
국자 씨처럼 온다
소설가 김훈은 이렇게 썼다. "나는 시를 쓰지 못하고, 시를 쓸 수 있게 되는 마음의 바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시적 대상이나 정황이 시행으로 바뀌는 언어의 작동 방식을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2008, 바다의 기별)
김훈이 '시가 씌여지는 마음의 바탕'과 '시적 대상이나 정황이 시행으로 바뀌는 언어의 작동 방식'을 이해 못하는 이유는 그가 철저한 산문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당대 한국어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아름다움과 정밀함을 가지지만 그것은 'A는 B(와 같)다'는 명제적 형식의 산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많은 글들은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이지만 여전히 산문이다.
그에 비하면 서영식의 시는 대부분 산문적이고 구체적인 일상의 정황들에 기대어 있지만 언제나 운문이다. 김훈이 산문을 쓰고 서영식이 운문을 쓰는 이치는 고양이가 야옹거리고 개가 멍멍거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혹은 짜장면은 짜장면이고 짬뽕은 짬뽕인 것과 같다.
김훈이 만약 시가 어떻게 오는 것인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서영식의 <국자>를 보여주겠다. "시는 저렇게 옵니다. 시가 시인의 마음밭에서 막 피어나는 모습은 저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