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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Sep 15. 2020

일상의 진리성에 대하여

김훈, <거리의 칼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12일 부임했다. 코로나의 8개월 동안 그의 앞 머리카락은 하얘졌다. 그는 늘 노란색 작업복 차림이었다. 방역망이 무너질 때나 무너진 대열을 다시 추스를 때도 그는 늘 차분한 어조로 현장의 사실을 말했다. 그는 늘 현실의 구체성에 입각해 있었고, 당파성에 물들지 않았고, 들뜬 희망을 과장하지 않았으며, 낮은 목소리로 간절한 것들을 말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과학의 힘에서 나왔고, 모두의 힘을 합쳐야 희망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거듭된 호소는 가야 할 방향을 설득했다. 그는 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말했는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말하기는 매우 희귀한 미덕이다.


청장이 된 그는 날마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방역전선을 지휘해 가면서 신설된 관서의 조직과 작동방식을 설계하고 미래의 감염병에 대처해야 하니, 그의 승진은 축하와 위로를 동시에 받아야 마땅하다.


부임에 즈음해서 그는 “방역에는 지름길이 없으며, 일상을 안전하게 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길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방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인용된 부분은 <한겨레> 9월10일치 8면 기사이다.)


그의 말은 분명했고, 알아듣기 쉬웠다. 그의 이 두 마디 말은 코로나 8개월의 경험을 요약하면서, 미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방역은 과학의 원리를 대중의 일상 속으로 확대하는 길이다. ‘살길은 생활 속에 있다’는 뜻으로, 나는 그의 말을 이해했다. 나는 날마다 정은경 청장이 하라는 대로 하고 있다."


김훈, 한겨레, 2020, 9. 14. 칼럼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62003.html#csidx623e7ca6d4b610f92cb7158b44950d8




공맹孔孟이 주창했고 주자朱子가 꽃을 피운 유가儒家 정신의 요체는 일상성에서 시작하여 일상성으로 끝난다. 성리학을 설계했던 송대宋代의 선구자들이 처음부터 대면하여 싸운 것은 불교와 도교의 탈세간적脫世間的, 초월적, 비현세적 가르침들이었다. 황제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학자, 관료, 상인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불교와 도교 사원에 가서 절을 했고 돈을 뿌렸으며 내세의 복을 빌었다. 북방의 거란족(요나라), 여진족(금나라) 오랑캐들에게 시달리는 와중에도 사찰과 도교 사원이 넘쳐났고 장정들은 군역을 피해 머리를 깎았다.


심지어 성리학의 설계자들조차 유불융합에 관심을 보였고 승려들처럼 반듯하게 앉아 명상에 잠기는 유행에 휩싸였다. 환관과 부패한 관료들에 둘러싸인 황제는 부처와 신선이 되는 꿈만 꾸었고 그나마 정신이 있는 사람들도 오랑캐와 싸우느냐 마느냐, 계산된 명분과 거기에 얽힌 권력의 지향에만 관심이 있었다. 백성들은 땅을 버리고 도망쳤고 도적때가 출몰했다. 단 한 줌의 인간도 위기가 닥치는 국가의 현실과 백성의 고난에 관심이 없었다.


주자는 끊임없이 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자기가 올리지 못하면 남이 올리는 상소의 내용도 들여다 보았다. 내용은 변함 없었고 황제의 외면도 변함 없었다. 주자가 상소를 올린 내용의 요지는 결국 저 『대학(大學)』의 "정심성의 격물치지(正心誠意 格物致知)" 여덟 글자를 벗어나지 않았다. 주자는 그 여덟 글자가 자기 평생에 배운 것 전부라고도 했다. 그것은 곧 삶의 일상성과 현실성의 강조였다. 마음을 반듯하게 하고 진실된 생각으로 현실을 직시하고 닥친 일들을 살피는 것. 세상을 다스리려면(平天下) 자기 한 몸을 먼저 다스려야(修身) 한다는 것. 성겁고도 하나마나한 소리, 별로 임팩트도 없어 보이는 이 말들은 그러나 부처와 신선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는 황제의 귀에는 송곳처럼 날카로왔다.


당장이라도 오랑캐가 쳐들어  것만 같은 북방의 현실백성들이 도망가고 도적때가 되어 반기를 드는 강토의 현실부패한 관료들이 득실거리는 조정의 현실무엇보다 한심한 꿈에 빠진 황제  자신의 현실모든 것이 무너진  현실을 너는 어쩔거냐...


주자는 황제의 면전에서 조목조목, 나라의 걱정거리와 그를 꾸짖는 글을 읽어내려갔다황제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듣다가 말했다. "물러가라" 내게  말은 "꺼져" 읽혔특히 무신년戊申年(1188년)에 올린 상소는 황제의 빰을 후려치듯 준엄했고 내용을 전해들은 이들은 숨소리도 내지 못했.


무너진 세상,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세상을 뒤로 하고 주자는 죽기 3일 전까지 『대학』의 주석을 고쳤다. 세상의 스승에게 남겨진 현실은 그 뿐이었다. (주자가 죽고 얼마 후 송나라는 유라시아를 석권한 몽골에 망했고 그의 손자는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했다. 멸망한 나라의 유민인 주잠朱潛은 고려왕이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고 조용히 은거했다. 원나라의 군대는 이 영향력있는 셀렙을 찾아 고려를 뒤졌으나 이미 몸을 숨긴 그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주씨 가문은 대대로 고려, 조선에 충성했고 지금까지도 훌륭한 국민으로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결국 삶은 하루하루 밥먹고 숨쉬며 영위되는 개별의 일상들이 모여 직조되는 것이다. 진리든, 운명이든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들도 일상을 벗어난 어딘가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일상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마음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진보와 발전을 향해 노력하는 가운데 쌓여가는 것이고 그러다보면 언젠가 눈앞이 밝아지고 의미의 집 한 채가 완성될 것이다. 이것이 유가의 가르침이다. 거기에는 어떤 심오함도, 달콤함도 없으며 초월의 꿈도 없다. 그저 묵묵히 인내하고 노력하는 삶에 대한 무심한 다독임 뿐이다.


정은경 청장을 통해 '일상의 진리성'을 발견하는 김훈의 인식은 자신이 읽었던 저 『근사록』의 가르침을 체현體現하고 있다.


하루하루 미치지 않고, 마스크 쓰고, 참고, 서로 돕고.. 이걸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면 그가 바로 이 시대의 주자요, 성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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