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늘 문제
내가 사는 책의 90%는 철학책이다. 그중 동양철학 분야가 80% 정도를 차지하는데 대략 이틀에 한 권 꼴로 책을 사지않나 싶다. 한 달로 치면 분량도 분량이지만 비용도 적지않다. 이 비용을 줄이는 방법 중의 하나는 헌 책을 구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헌 책을 구입하는 것이 꼭 비용 때문만은 아니다.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책을 구하는 방법이 헌 책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 동양철학서의 경우에는 중국책, 일본책 같은 것도 헌 책 사이트에 종종 올라오는데 직접 수입하는 수고로움을 줄일 수도 있고 가격도 싸서 횡재한 느낌이 드는 경우도 있다. 또 도서관에서나 볼 수 있는 고색찬연한 영인본 책들이 나오기도 한다. [퇴계전서]나 [율곡전서] 같은 책들 말이다. 이런 책들은 <예스24>나 <알라딘> 같은 곳에서는 구할 수 없다.
구입을 하고 보면 헌 책이라고 꼭 누가 사용했던 것만은 아니다. 창고같은 곳에서 오래 잠자다가 헌 책으로 풀리는 경우도 꽤 많아서 실제로 구입하고 보면 거의 새 책인 경우도 많다. 이젠 구할 수 없는 책을, 실제보다 저렴하게, 새 책 수준으로 산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크겠는가.
헌 책을 사다보면 재미있는 경우도 많다. 가령, 어느 저자가 누구에게 친필 서명하고 기증한 책이 내 손에 들어오기도 하는데 얼마전에 산 책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 학자가 모 정치인에게 선물한 책이어서 깜짝 놀랐다. 그 정도 사회적 지위가 되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선물받은 책을 헌 책으로 팔았을까.(어쩌면 본인이 판 것이 아닐지도) 책 중간에서 1만원 짜리 지폐가 나온 적도 있었고 전화번호를 메모한 쪽지가 나온 적도 있다.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은 나중에 그 전화번호를 애타게 찾았던 것은 아닐까. 또, 도서관 직인이 찍힌 책들이 입수되기도 하는데 처음엔 누가 훔쳐다가 팔았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꼭 그런건 아니고 도서관에서 책을 폐기하는 경우에 그렇게 흘러나오기도 한단다.
책에 따라서는 가격이 새 책보다 더 비싼 경우도 흔하다. 그러니까 나름 명저같은 경우는 서너배 비싸게 나오기도 하는데 그 값을 주고도 저 책은 꼭 소장해야해, 라는 생각이 들어 구입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하지만 얼마 후 기적같이 개정판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초판을 소장한다는 허탈한 자부심에 기댈 수 밖에)
이렇게 구입한 책들을 다 읽지는 않는다. 물리적으로 그럴 시간도 안되고 책의 특정 부분만 보기 위해 사는 경우도 있다. 또 꼭 지금 볼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가지고는 있어야 할 책이라는 판단 때문에 사기도 한다. 때로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떡볶이를 먹는 것과 비슷한 원리로 책을 사기도 한다.
문제는 이렇게 구입한 책들을 다 쌓아둘 방법이 없다는 것인데 방이 뺑둘러 책장인 것은 물론, 그 책장에도 2중, 3중으로 책들이 쌓여간다. 쌓여가는 책들을 볼 때 드는 생각은 딱 하나다, "죽기전에 다 볼 수 있을까."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다음처럼 분류가 가능할 듯도 싶다.
1.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책
2. 지금은 아니지만 죽기 전엔 꼭 볼 책
3. 볼 것 같지는 않지만 절대 방출 할 수 없는 책
4. 볼 것 같지도 않고 결국엔 방출해야 할 책
5. 무의미한 책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책이 쌓여가는 것이 내 머리속이 풍요로와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