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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r 21. 2016

<사울의 아들>

헛되고 헛되도다

동족들이 끔찍하게 죽어가고 자기 목숨도 위태로운 아우슈비츠에서 아들을 온당하게 장례지내려는 생각은 얼마나 무모하고 이기적인가.


영화는 시종 좁고 답답한 카메라 앵글로 이 질문을 던진다. 관객은 내내 불편하다. '저런 이기적인 사람이 있나', '저 상황에서는 죽은 아들보다 살아있는 동족을 더 걱정해야 하는거 아닌가'


사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노, 사울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 자신도 자신을 설명하지 못하는데 누가 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얼마나 끔찍한 곳이던가, 이것도 요점은 아니다. 아우슈비츠가 지옥임을 보여주는 영화는 많았다. 오히려 이 영화가 묘사하는 아우슈비츠는 아웃포커싱으로 생략되고 간소화된 모습이다.


그것은 아마 의미와 무의미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삶도 무의미하고 죽음도 무의미하다.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의 풍경 속에서 의미있는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그런 와중에 아들을 조상의 전례에 따라 장사지낸다는 것은 삶과 죽음이 지닌 본래적 의미 - 죽음을 전송하는 의식을 통해 삶의 의미와 존엄성을 확인하는 - 를 회복하는 일이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그런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곳은 지옥이 아니었을 것이다. 심지어 나치조차 아우슈비츠에서는 삶과 죽음의 무의미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그런데 삶의 의미를 되찾겠다니.


하지만 다 소용없었다. 지옥의 일은 지옥의 일일 뿐이었다. 지상의 모든 의미는 벌거벗겨진 채 가스실에서 처형되었다. (전후戰後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고 절규했다. 세계와 인간의 존재 의미가 지옥불에 모두 소각되었는데 더 이상 무슨 문학이 가능할 것인가)


아들이 죽고, 그 아들을 장례지내려던 사울도 죽고... 숲은 고요했다.


새들이 날아오르듯 무심하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갔다. 레퀴엠같은 음악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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