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김훈, 비트겐슈타인
소설가 김훈은 <칼의 노래>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를 두고 고심했다고 어디선가 말했다. '꽃이 피었다'가 적합할지 '꽃은 피었다'가 적합할지를 두고 말이다. 한국어 특유의 디테일이 묻어나는 이 주격조사의 문법적 차이는 무심코 읽으면 그 말이 그 말이고 의미의 전달에도 별로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김훈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꽃이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의 언어이고 꽃은 피었다는 객관적 사실에 주관적 정서가 첨가된 언어이다' 결국 김훈은 꽃이 피었다를 택했다.
김훈이 이렇게 스트레이트한 문장을 숭상하는 것은 젊은 시절에 읽은 난중일기의 문체와 오랜 세월 기자를 하면서 몸에 밴 저널리즘적 태도에서 일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의 존재론은 '사물존재론'이었다. 이 세계에는 무엇이 있느냐, 그것의 속성은 무엇이냐 등등. 자연철학에서 출발한 이런 존재론은 비트겐슈타인이 출현하기 전까지 형이상학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세계는 사실로서의 세계이다'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선언 이후 형이상학은 변했다.
이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해와 달, 나무와 바위 등등의 사물이 아니라 '해와 달이 저기 있고 나무와 바위는 저기 있다'는 무수한 사실들이다. 그런 사실들을 제외한다면 해와 달, 바위와 나무를 아무리 쌓아 놓아도 그건 하나의 세계가 될 수 없다. 그렇게 사물들이 집적된 세계에는 '의미'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바위들만 굴러다니는 황량한 화성의 표면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폴 리쾨르는 '이 세계에 필요한 것은 사랑, 더 필요한 것은 정의, 정의보다 더 절실한 것은 의미'라고 말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 의미는 영문학자들에게 있어 영어와 같다. 철학은 의미를 묻고 의미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심지어 의미의 의미를 묻는다. 이것은 철학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새로운 물리학적 사실을 발견했다면 누군가는 그것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 모두는 나를 둘러싼, 나에게 닥친 것들의 의미를 찾는데 매일 매일을 소진한다.
이 모든 시작은 사실에서 출발한다. 사실은 참인 사실과 거짓인 사실로 구성된다. '사과는 붉다'는 참인 사실이고 '사과는 검다'는 거짓인 사실이다. (참이든 거짓이든) 사실은 의미를 내포한다. 의미는 사실속에 거주한다. 그러면 '지옥불은 뜨겁다'는 사실일까, 노. '지옥불은 차갑다'도 사실이 아니다. 그런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명제들은 의미를 결여한다.
우리가 그토록 골몰하는 의미는 (참이든 거짓이든) 사실에 기반한다. 없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의미를 끌어오지 못한다. '사과는 검다'는 하나의 (거짓)사실이고 거짓이라는 의미를 주지만 '지옥은 뜨겁다'는 (참이든 거짓이든)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무의미에 대해 우리는 침묵한다.
김훈의 글과 사유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의미의 숲을 부유하다가 다시 사실로 돌아온다. 그는 사실을 왜곡하기 십상인 형용사, 부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사실에 형용사와 부사를 덧붙일 때 세계는 과잉에 빠진다. 작금의 우리는 의미가 넘쳐나는 세계에서 허우적거린다. 그래서 모든 문장가들의 꿈이 명사와 동사로만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까지는 사실 교과서적인 말인데 이 세계가 정말 '사실로부터 출발한 의미'만으로 구성될까, 오히려 사실이 아닌 것에서 빚어진 무의미의 의미, 의미도 아닌 것들, 시시한 것들... 그런 것들이 세계를 구성하는 더 실질적인 요소는 아닐까, 요즘 심각하게 생각한다.
꿈과 신화, 무수한 무의미들, 헛소리들.. 어쩌면 이 세계의 진짜 의미를 구성하는건 그런 것들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