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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e May 09. 2016

참나(眞我)는 어디에

그건 누구 가르침인가

'참나(진짜 자기)를 찾으세요'라는 말을 한다.


'참된 나'란 무엇일까. 참된 나가 있으면 거짓된 나도 있을까. 우리집 바둑이의 참된 모습은 무엇일까...


'테세우스의 배'라는 형이상학 논제가 있다. 내용은 이렇다. 테세우스라는 배가 있는데 이 배는 오랜 시간을 거치며 끊임없이 그 부속과 부품, 마모된 선체 일부 등을 교체했다. 이렇게 해서 어느덧 본래의 부품과 부속, 선체가 모두 교체되었다면 그 배를 계속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교체된 낡은 부속과 부품, 떼어낸 선체를 보관했다가 완벽하게 다시 조립했다면 과연 어느 것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불러야  하는가.


참나를 찾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집나간 바둑이를 찾기 위해서는 동네 여기저기에 바둑이 사진을 붙여서 생김새를 알려야 하듯이 잃어버린 참나를 찾기 위해선 먼저 그 생김새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참나는 모양이나 특징이 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집나간 바둑이의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면 바둑이를 바둑이로 알 방법이 없듯이 참나도 그 모양이 수시로 바뀐다면 참나를 참나로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나. 테세우스의 배가 변천을 거듭하듯 나라는 존재도 몸과 마음이 수시로 변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것들을 뛰어 넘어 변하지 않는 내가 또 있나. 수시로 변하는 내가 변하지 않는 나를 찾을 수 있나. 그렇게 변하는 나와 변하지 않는 나는 별개인가. 도대체 '나'라는 지칭이 지목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며 '참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무엇이 '진짜 나'인가.


고대 인도인들이 숭배했던 베다나 우파니샤드는 '우주를 주재하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것과 너 자신을 일치시켜라'고 가르친다. 범아일여(梵我一如)가 그 말이다.('梵'은 우주적 자아, 절대적 자아를 일컫는 '브라흐만'의 음역)

그런데 문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브라흐마니즘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그런 브라흐마니즘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삼았다. 부처님은 말했다.


'세상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있으니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 그런 것을 초월한 그 자체로 절대적이고 불변인 것은 없다'


이 말에 당대의 철학자들이나 변론가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불변하는 우주적 진리 따위는 없다는 말은 당시의 가치체계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혁명적이고도 불온한 주장이었다. 불교의 철학적 이론은 모두 저 주장을 논증하고 변설하기 위한 길고 복잡한 주석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불교 경전의 여러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부처님은 '영원불변하는 절대적 존재'라는 개념을 지속적으로 거부했다. 삼라만상은 모두 원인과 결과에 따라 생멸하는 것인데 그것은 더 큰, 혹은 또다른 인과의 사슬에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사슬은 끝없이 펼져진 그물과도 같아 그 어디에도 절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구석이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상대적'이라는 뜻도 아니다. 엄밀히 그것은 인과적이다. 무언가가 절대적이라면 그것은 어떤 원인이나 작용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해야하고 조금도 변하지 않아야 하는데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아니, 이 세상 자체도 인과적 존재이다. 우리가 속한 이 우주 자체가 생멸을 겪는 존재인데 이 생멸의 우주를 벗어나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인식주관으로는 판단불가이다.


'참나를 찾자'라는 말은 아마도  어떤 도덕적/실용적 유용성을 가졌을 것이다. 세파에 휩쓸려 경황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숙고해 보라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저 슬로건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불변하는 '참나'라는 게 실재한다고 정색을하고 주장한다면 그건 부처님의 가르침보다는 힌두교의 가르침에 가깝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시간이 지나 이런 문제는 불교의 분파를 나누는 문제로까지 발전된다. 사실은 그런게 존재한다, 안한다는 발상 자체가 부처님이 보시기엔 핀트를 빗나간 것이다.


개구리의 팔다리를 핀으로 고정하고 아무리 해부해보아도 거기서 개구리의 진짜 모습 따위는 찾을 수 없다. 개구리는 그냥 개구리다. 참된 개구리가 있고 거짓된 개구리가 있을 리 없다. 근데 사람은 좀 다르다고? 그럼 진짜 철수는 뭐고 거짓된 철수는 뭔가. 여러 사람중에 철수를 식별하는건 어렵지 않지만 철수 중에 철수를 찾는 일은 무슨 의미란 말인가. '참나를 찾자'라는 말의 아이러니는 참나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건 찾을 수 없거나 그게 무언지 안다면 또 굳이 찾을 필요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복잡한 이론적 논의를 통과해도 '참된 자아'라는 말 자체의 모호함을 해결할 수는 없다. 서양철학에서는 그것을 언어적 문제, 일종의 '언어의 오작동'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우리의 사유체계가 지닌 일종의 '버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혹은 '형이상학적 열망'이라고도 한다. 이성적/합리적으로 대답될 수 없는 것에 대한 끝없는 질문들,


우리는 언제나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우주의 밖은 무엇인가 등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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