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쥬란 이런 것
<킬빌>에 대한 세간의 공통된 리뷰를 보자면 우선 이 영화는 감독이 어린시절부터 흠모해 마지않았던 동서양의 B급 영화들에 대한 오마쥬와 트리뷰트라는 것,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와 홍콩의 무협영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들이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키고 녹아든 영화라는 것, 우마 셔먼을 위한 영화라는 것...
변기를 전시실에 설치하고 예술품이라고 우기는 방식으로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이해해야한다고 말하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글쎄.
영화의 내용도 동서양의 B급 고전들이 무수히 반복했던 '복수'를 다시 한번 비틀고 정형화시키고, 거장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리바이벌했다. 혹시 이 영화가 아주 약간의 품격을 지녔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보여주는 복수가 기왕의 B급 영화들이 견지했던 야비하고 잔혹한 복수가 아닌,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하는 복수, 매너있는 복수 정도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큰 의미는 없다.
이 영화에서 인간의 정신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오직 육체뿐이다. 스크린 가득 뿌려지는 '피범벅'은 훼손된 육체의 상징이요, 전형이다. 브라이드가 휘두르는 칼에 악당들의 팔다리는 무참히 잘려나간다. 잘린 머리가 데굴데굴 구르고 피는 분수처럼 뿜어나온다. 도저히 아이들이 보아서는 안되는 상황이고 저렇게까지 잔혹하게 그릴 필요가 있나 인상을 찌푸리게도 한다. 왜? 왜 저렇게까지?
'그것은 인간 존재의 사물성(事物性)을 극대화시킴으로써 현대 문명에 내장된 비인간적...'
누군가 이런 식의 대답을 시도한다면 미안하지만 그건 오버다. 그런건 없다. <킬빌>은 감독이 어린시절 감동받은 B급 영화들에 대한 오마쥬라고 했다. 그 영화들의 각각의 장면들을 가위로 오려서 이리저리 붙이고 색을 덧칠한 다음 현대적 감각의 스타일리쉬를 또 설탕처럼 잔뜩 뿌려 '간지좔좔'로 뽑아낸게 바로 <킬빌>이란 말이다. 거기에 심오한 사유 따위는 없다.
분리수거된 것들을 다시 도색하고 조립해서 새 물건처럼, 혹은 자기 물건처럼 포장하는 기술, 그게 바로 변기를 예술품이라고 우기는 방식이며 혼성모방이니, 무슨 하이브리드니 하는 말들로 현혹하는 포스트모던의 훼이크이고, 그 결과 훼이크가 하나의 진실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과 결과는 마침내 예술로 간주된다. 타란티노 특유의 웃지못할 코미디, 지독한 농담인 것이다.
과도한 육체의 훼손은 일본 B급 사무라이 영화가 지닌 스너프적인 성격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 부분이 궁금하다면 일본인들의 허무주의적 미학, 혹은 탐미적 즉물성이나 변태성을 연구하는게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인간의 육신도 종국엔 늦봄의 벛꽃처럼 표표히 휘날릴 존재라는 일본적 유물론으로 저 육체훼손의 사태가 설명될 수도 있을런지.
타란티노 감독의 트리뷰트는 지극하고 순정했다. 오마쥬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마 셔먼의 아버지가 세계적 불교학자인 로버트 셔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다. '우마'라는 이름도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티베트 불교용어에서 따온 것이다. 다른 형제들 이름도 그런 식이다. 로버트 셔먼은 젊을 때 티베트 불교 승려 생활도 했었다. 그때 달라이 라마와 같이 공부했고 친구가 되었다. 리차드 기어와 우마 셔먼은 헐리우드의 셀렙들 중 가장 알려진 불교도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