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rtistical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rowne May 01. 2016

<헤이트풀 에이트>

누구도 Red Rock에 가지 못한다

폭설이 내리는 와이오밍의 벽촌, 그 폭설에 발이 묶인 위험한 여행객들...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The Hateful eight>은 이 세계가 얼마나 터무니없고 우연한 지옥인지를 보여주는 지독한 농담이다.


그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이 영화에서도 폭력은 인간과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가장 밀도 높은 언어이지만 그 언어는 곧 '타인을 죽이고 살아남고자 했으나 결국엔 자기도 살지 못하는' 자멸의 언어이다. 폭력은 과연 지옥의 언어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마땅함은 대상을 가리지않는 무차별적인 것이고 아주 보편적인 것이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일방향이란 점에서 폭력은 언어이되 커뮤니케이션은 아니다.


고립된 역마차 휴게소에서 비밀이 밝혀지면서 살육극이 벌어진다. 연극같은 구도여서 더더욱 드라마틱하다. 일상적이었던 언어는 모두 기만이고 헛소리였으며 진짜 언어는 폭력이지만 그건 언어가 아니다. 바로 그 자리에 지옥이 강림한다. 우리 모두 죽어 마땅한 곳, 영문도 모르고 죽어야하는 곳,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곳, 소통의 부재...

우리 모두 가고자 했던 레드락 따위는 이 눈발 속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어디로 갈 수도 없고 누가 올 수도 없는 곳, 길을 잃은 곳,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이며 우리의 처지이다. 거기서 우리가 할 일은 서로를 죽이고, 속이고, 오해하는 것, 장엄한 지옥도는 그렇게 완성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길가의 눈덮인 십자가는 구원의 부재를 드러내는 시그널이다. 이 땅에 온 이상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오지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 세계의 부조리를 드러냈다면 이 영화는 폭설에 갖혀 레드락에 갈 수 없는 상황으로 그 부조리를 재현한다. 모두는 제각각의 이유로 레드락에 가야하지만 폭설은 그칠 기미를 안보인다. 갈 수 없는 곳이면 존재하기는 할까. 고도는 있기는 했던가. 그래서 이 영화는 타란티노 버전의 부조리극이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거기에 더해 그것이 그냥 부조리가 아니라 하나의 지옥임을, 지독한 농담으로 빚어진 지옥임을 보여준다. x같은 여덟 인간이 빚어낸 x같은 지옥 말이다. x같은 감독이 x같은 영화를 만들어 세상은 다 x같은 지옥이라고 말하는 아주 x같은...


이런 지옥은 <페스트>에서 까뮈가 보여준 것이긴 하지만 그는 끝내 그것이 지옥으로 끝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란티노와는 만나지지 않는다. 까뮈가 고퀄리티의 실존주의를 달성했다면 타란티노는 그냥 농담, 굳이 정의하자면 포스트모던이 어쩌고저쩌고하는 훼이크일 뿐이다.


서부영화의 문법을 따르되 서부 영화스럽지 않은 영화, 무엇보다 서부영화의 불멸의 키워드인 권선징악이 존재하지 않는 영화, 아가사 크리스티가 멀리서 웃고 있는 영화... 엔리오 모리꼬네가 음악을 담당했다. 음악만은 정상이다.



No one comes up here without a damn good reason
매거진의 이전글 <와호장룡2>, 덧없음과 떠남의 동양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