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儒家와 도가道家는 어떻게 다른가
무협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보통 유가儒家적 정서가 아니다. '무술을 연마하여 신선의 경지에 오른다'는 컨셉이나 허공을 붕붕 날라다니는 허황됨은 유가적 사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유가는 현실에서 발을 떼는 법이 없고 신선을 목표로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의 고수들이 은둔에서 나와 세상을 평정한 후 다시 은둔으로 돌아가는데 이 또한 유가적 성향은 아니다.
유가는 가족과 공동체를 떠난 곳에 진리가 있다는 탈속脫俗의 가르침을 혐오한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마당쓸고 사람 대하는(灑掃應對) 가운데 진리가 구현되고 세계와 개인의 온전성이 완성된다고 믿는 것이 유가의 전형이다.
무엇보다 유가의 사유는 공맹孔孟의 가르침이 그 중심에 있는데 공맹의 가르침 어디에도 열심히 수련해서 하늘을 날라다니라는 말씀은 없다. 둔갑술이나 하늘을 나는 것, 손바닥에서 바람이 나오는 행위는 인의仁義를 구현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유가적 수행의 목표는 성인聖人인데 이는 신선과는 질적으로 다르다(성인은 공동체 안에서 완성되고 신선은 공동체 밖에서 완성된다. 성인은 세간世間을 지향하고 신선은 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한다).
물론 무협의 영웅들도 제세구민의 기치를 들지만 그들은 마지못해서, 혹은 본의 아니게 악당들을 물리치지 처음부터 권선징악의 고상한 목표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들은 어서 악당을 물리치고 소박한 은둔으로 물러나길 소망한다. 악당을 물리치고 석양을 향해 떠난다는 서부영화의 컨셉도 근본에서는 비슷하다. 영웅은 속세에 머물지않는다. 그들은 왔다가 떠난다.
'그토록 피를 부르는 싸움도 결국엔 다 부질없다'는 관념은 폭력의 허무함을 말한다기보다는 이 세상의 덧없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대붕이 높은 곳에서 지상을 내려다 보는 관점이고 이는 대게의 무협영화들이 노장老莊적 분위기에 기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폭력을 통해 이룬 평화는 그러기 위해 치른 희생과 거의 정비례해서 선악의 총합은 제로에 가깝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영웅은 세상을 등진다. 그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노장의 자연주의, 혹은 허무주의이다. 소림사로 대표되는 불교적 이미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건 그냥 승려들의 영화로 보는 것이 옳다. 살생을 금하는 가르침과 사찰의 이미지는 폭력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일 뿐 불교의 가르침은 그런 방식으로 구현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영화가 폭력을 보여주고 질타하는 방식은 허무이다. 폭력으로는 얻는 것보다 잃는게 더 많다는 결론으로 영화의 폭력은 미학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 허무를 중화시키기 위해 남녀 주인공들의 성취된 사랑을 보여준다. '폭력은 부질없고 이 세상은 허무하지만 그래도 천신만고 끝에 얻은 우리의 사랑만은 소중하다'
<와호장룡2>도 그런 영화이다. 은둔에서 나온 고수가 악당을 물리치고 다시 은둔으로 들어가는 단순한 구도가 이 영화에서도 반복된다. 폭력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폭력이 아니고서는 또한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아이러니 때문에 세상은 슬프고 허무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반전反戰 지향의 평화주의를 내포하며 애욕을 포기하고 세상을 등진다는 점에서 염세주의를 함축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노자와 장자가 손짓한다. 게다가 영화의 전편을 통해서 거칠고 잔혹한 남성성을 은근하고 포괄적인 여성성이 압도하는데 이 또한 도가道家적 컨셉이다.
배신은 치명적이고 사랑은 안타까웠다. 나를 키운게 사실은 원수였구나, 악인은 악인답고 선인은 선인답다. 풍광은 빼어나고 폭력이 구현되는 인간의 몸은 가엽고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몸 사이로 시퍼런 칼이 드나들어 꽃잎이 지듯 몸뚱아리는 스러지고 그 몸이 스러진 들판위로 허망하게 바람이 분다. 헛되도다, 세상이여. 스러진 몸뚱아리 위로 또다시 꽃이 피고 바람이 불어 끝내 우리는 잊혀질 것이다. 거대한 잊혀짐으로 이 세상은 완성될 것이다. 그것이 <와호장룡>이 도달하는 무위無爲이고 자연주의이다.
강江과 호수가湖에 꽃이 피고 바람이 불어 마침내 사람도 자연이 되는 노장의 강호江湖와, 위로는 하늘의 명(天命)이 있고 아래로는 사람의 도리가 있는 유가의 천하天下는 끝내 다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치할 수 없는 이 두가지 사유의 당김과 밀침이 동아시아적 사유의 뿌리이다.
전편의 영상미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몇몇 대사는 건질만했다. 나이든 양자경은 애틋했고 견자단은 진중했다. 그 마음들이 영화의 무게를 잡았다.
참고로, 臥虎藏龍이라는 말은 중국이 수나라로 통일되기 이전, 북주(北周 ; 5호16국의 마지막 패자)의 유신庾信이라는 문신이 지은 시에서 유래하는데 원래의 문구는 '臥龍藏虎'이다.
옛 말에 학자의 이름은 사후 5년간 기억되고 무사의 이름은 20년간 기억된다고 했다. 이는 무사에 대한 칭송이라지만 내겐 저주로 들린다.
천자루의 나뭇가지와 검을 부러뜨려도 자신의 의지가 꺽일 때 더 많은 걸 깨닫는다.
뻔한 공격에는 뻔한 결과가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