는 민폐인걸까
일을 그만둔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회사를 다닐 땐 매일 같이 출퇴근을 하며 일하니 나태함을 느낄 새가 없었는데, 막상 자유의 시간이 주어지니 이 시간을 왠지 밀도 있게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매일 같이 나가 놀고, 새로운 곳에 가보고, 경험하려고 애썼다.
그러다 2주 전에 학원에 등록을 했다. 이미 동네에서 교양강좌는 듣고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기에 앞서 간단한 기술들을 배워두면 좋을 것 같았다. 학원을 다니며 무언가를 공부한다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나에게 맞는 수업이 당장 당일 시작하는 수업이라 긴장할 틈도 없이 바로 강남역으로 향했다. 하루에 네 시간씩, 매일 출석하는 수업이다. 어딘가에 매일매일 오고 가는 일. 오랜만에 겪는 출퇴근의 감정이었다. 이 수업은 실습 위주라 꽤 흥미 있고 지루함이 덜한 편이었다. 해야 하는, 가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 그리고 한 달 반 동안 누려왔던 자유 시간이 사라진 것들은 싫었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매일 내가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인간은 역시 언제나 자유 속에서만 만족감을 얻는 건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수업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진도를 잘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고, 질문이 많은 사람, 늘 지각하는 사람, 대답을 참 잘하는 사람같이 각자의 캐릭터들이 분명하다. 이 관계는 조금 특이하다. 매일 만나고, 네 시간을 내내 함께하는데 서로 인사조차 나누지 않고 ‘모르는 사이’에 가깝다. 이름은 알고 있지만 부를 일이 없다. 이 수업이 끝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질 사이다. 나는 내 옆자리에 앉은 학생과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대답도 잘하고 수업도 잘 따라간다. 관심사도 비슷한 것 같다. 그렇지만 쉽게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할 수가 없다. 모두 자신의 공간을 침범받고 싶지 않은 것만 같이 느껴진다. 이건 사실 이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같은 건물에 살고 매일 같은 곳으로 들어오고 이곳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는다. 그렇지만 이름도 모르고 누가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사는 곳만 안다. 내 옆집, 옆에 옆에 집, 옆에 옆에 옆에…. 나는 이들과도 친하게 지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이웃이 집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면 나가려던 문손잡이를 놓고 잠시 머뭇거린다.
우리는 방해받고 싶지 않고 방해하고 싶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사실은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그 침묵을 깨고 서로에게 말을 걸고 손을 내밀고 싶어 한다는 상상을 해본다. 상대가 싫어할까, 방해받는다고 생각할까, 민폐를 끼친다고 생각할까 걱정하면서 그 손을 거둘 테지만. 그러면 조금 나아진다. 다들 마음은 안 그렇다고. 그런데 나는 막상 누군가 말을 걸어오면 과연 그 말을 반길까.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건넬지 모르는데 어떤 말이든 내가 반길 수 있을까.
지난주에 지하철에서 정신질환자로 추측되는 사람을 마주쳤다. 그 사람은 내 옆자리에 앉았는데, 자꾸 앞에 서 있는 모르는 학생들에게 사탕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고, 혼자서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갑자기 나를 때릴까 봐, 나에게 해코지할까 봐 무서웠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해코지를 당했을 때 여기 빽빽하게 앉아있는 사람들은 과연 나를 도와줄까. 여기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미친 사람과 함께 나란히 앉아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라고. 그렇지만 다시 또 같은 생각을 해본다. 이 사람들 모두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그리고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도와줄 거라고.
수업은 한 달 동안 진행된다. 한 2주가 조금 넘게 남았다. 이 남은 동안 옆자리 학생에게 한마디라도 걸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기길 바라본다. 더 나아가 같은 층에 내린 이웃에게 고갯짓으로나마 인사라도 건넬 수 있기를.
2024년 2월 말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