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한 허수아비가 화가 난 이유
회의론자가 되기 전까지의 과정은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깊었던 사람과 나보다 행복하길 바랬던 상대가 나의 농작물을 모조리 태워버렸고 생각지도 못한 화전민신세에 당황한 나는 사람과의 작은 부딪침에도 불씨가 튈까 의심부터 했다.
나의 밭은 듬성듬성 일구었지만 넓게 씨를 흩뿌린 덕에 여러 가지 작물이 자라 풍요로웠고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들이 아름다웠으며 제철마다 열리는 열매들 때문에 언제나 풍요로웠다.
이리저리 얽혀있는 줄기들과 서로 맞닿아 안부를 묻는 꽃봉오리들 비옥한 땅 아래서 여럿이서 손잡은 뿌리들은 작은 불씨마저 설켜 다 같이 잿더미로 변했다. 나는 낙지의 잘린 다리를 보는 심정으로 내가 죽어가며 몸부림치는 것을 보아야 했다.
그렇게 다음부터는 정갈하고 질서 있게 구획을 나누어 밭을 가꾸었고 감자밭에는 감자만이 호박넝쿨에는 호박넝쿨만이 서로를 감을 수 있었다.
다른 농작물의 씨앗이 혹여나 다른 구획에 들어갔으면 두려움에 지체 없이 뽑아버렸고 잡초건 꽃이건 간에 눈에 보이는 대로 베었다.
더 이상 나의 밭에는 싱그러운 꽃과 말게 지저귀는 새는 없으며 자연스럽게 얽힐 수 없었고 내가 모르는 어떠한 것이 있을 수 없다. 내 땅이 더 이상 잿더미가 뒤덮인 회색으로 물들지 않고 짙은 갈색으로 온전히 남아있기 위해 허수아비도 두지 않은 채 목 좋은 곳에 하루종일 서서 밭을 지키는 중이다.
다수의 의견을 종합하기 위해서는 눈치를 아주 잘 보아야 한다.
혹여나 일행 중 무례하고 배려심 없는 사람이 있다면 누군가는 의견을 종합하는 것 자체로도 불만일 것이다. 그럴 때 나는 가차 없이 잘라내는 편이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해도 눈치는 잘 보는 것이 좋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의견의 종합도 중요하지만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각종 상황들을 고려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저녁메뉴를 정할 때 어느 누구도 구구절절 몇 달 전의 이야기부터 꺼내면서 이것을 먹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않는다. 이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눈치를 슬슬 보아야 하는데 이건 관계의 유지를 위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사회인으로서의 필요한 기술 중 하나다.
직장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리더의 자리에 있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상황에 놓였다. 학창 시절에도 의견을 종합하는 중립적인 사람이었기에 치우치지 않아야 하고 모두의 눈치를 보며 개개인의 니즈를 맞춰주기 위해 최선의 결과값을 도출해 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감능력을 추가한 새로운 버전의 고성능 Ai가 탑재된 공학용 계산기 정도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그 사람들의 감정이나 상황들을 계속해서 파악하고 주시하면 어느 정도 의심이 사라지게 되는 것 같다. 그들에 대해 많이 알고 작은 몸짓이나 표정 하나에도 신경을 쓰면 자연스레 친근한 마음이 들고 점점 나의 의견보다는 남의 의견을 더 중요시하는 나를 보며 그들에게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배려를 하는 정말 아끼는 존재'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이게 된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렇다.
정작 그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싫은 내색을 잘하지 않는 편이기에 배려를 해준다 라는 것이 점점 빛이 바래 당연시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래도 나는 의심하지 않고 그들을 배려하고 존중하며 위했다. 내 밭이 다 타버렸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내가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게 조심히 다녔으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라는 생각이다.
잘못은 바깥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안쪽에서 찾아야 한다. 가게가 장사가 안된다고 손님 탓을 하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내 밭을 태워버린 그들의 탓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들마저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그래야만 나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불행을 바라고 시기하고 저주한다면 나 또한 그 마음을 품고 있어야 하기에 그렇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순 없을 것 같다. 결말을 아는 영화를 2번 보는 취향이기도 하고 고생을 사서 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에 품었다가 빼앗겨 한참을 아파하다 기억 속에 묻혀 체념한걸 다시 품기에는 두려움이 앞서기에 지금으로도 만족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