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되물음
매사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일관했던 나는 물음에 대해 한정적이었다.
관심이 있는 분야나 사람 또는 지식에 대해서만 궁금해하였고 앉는 자리도 구석자리를 좋아하던 나는 파는 것도 깊게 팠다.
'왜'에 대한 물음을 해본 적이 있다. 왜 나는 물음을 가지고 궁금해하는가 또는 궁금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물었지만 항상 정해진 답은 관심이 있기에 그러했다.
지식과 학문에 있어서 더 폭넓고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나만의 방식으로 재 해석해 내 마음껏 펼치고 싶은 마음이 있던 나는 궁금한 걸 넘어 이걸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가격을 물어보지도 가격표를 보지도 않고 카드부터 들이밀었다.
특히나 무언가를 배울 때에는 어떠한 것을 포기하는 경향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음악을 배울 때에 그랬다. 침을 뱉으면 피가 나고 목이 따가운 걸 넘어 찢어지는 느낌이 들었을 때에도 나는 노래했다. 그것이 행복했고 점점 나아가는 나의 목소리가 나의 알량한 건강 따위는 깔끔하게 묵살해 주었기에 나는 배움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이는 인간관계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진행방향이었는데 어찌 되었든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듯하다.
관심이 있거나 흥미를 끄는 것들은 꽤나 매력적이다. 야채를 고를 때도 만져보고 두드려보고 갈변된 곳은 없나 꼼꼼히 체크하고 사는 편이라 그런지 아무리 매력적인 요소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꼭 검증절차는 걸치고 넘어가야 했다.
노력대비 성과가 나오는 것을 보며 배운다는 것에 대해 더 많은 흥미를 갖게 되었고 나의 지식적인 측면에서의 관심은 결국 쇼핑리스트가 되었다. 인간관계에서는 관심이 있다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표현정도는 했다.
물음을 지속할수록 내 안쪽으로 파고드는 물음표의 둥근 곡선은 점차 내가 무엇을 진심으로 좋아하는지를 알려주었고 마침표를 찍어 확신을 가지게 도와주었다.
물음에 물음을 계속한 결과 관심에도 2가지의 유형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첫 번째는 궁금함으로 그치는 관심 두 번째는 그것이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있는 관심이 있었다.
낙오 7일 차 무인도에서 코코넛 나무가 나타난다면 나는 당장 코코넛 열매를 깨부숴 갈증해소를 하기에 급급할 것이다. 그렇게 갈증해소를 하게 되면 그다음의 코코넛을 얻기 위해 코코넛 나무를 갖은 방식으로 노력해서 키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코코넛 열매가 갈증은 해소해 줄지언정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고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다. 더욱 좋은 갈증해소 방법이 생겨 코코넛은 쳐다보지도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코코넛은 방치되어 버리게 될 수도 있지만 취향에 맞고 그것이 합리적이라 느끼며 갈증이 해소된 후에도 관심이 간다면 나는 코코넛 나무를 키울 것이다.
아쉽지만 나는 코코넛 나무를 보자마자 이걸 키워서 더 많은 갈증을 해소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운명론자는 아니라 일단은 마시고 보는 편이다. 어쩔 수 없이 지극히도 편협하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고 탐스러우며 보자마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코코넛 나무는 아직은 없기에 그렇다.
무인도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나의 관심은 그렇게 넓지 않았고 그저 나를 위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한 공간 정도를 인지하면 되었기에 굳이 힘을 써서 두려움과 예상치 못한 어떠한 것을 무릅쓰고 확인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내가 발견한 코코넛나무 몇 그루와 함께 갈증 없이 지내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떠나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더 좋은 코코넛나무를 위해서가 아닌 이젠 코코넛이 질려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