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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Jun 21. 2023

노스탤지어

조향사의 회고록



여러 사람들을 홀릴만한 그런 영화 같은 향수를 만드는 일은 꿈꾸지 않았으나 한 사람의 하루를 행복하게 할 향기를 만들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해주는 어울리는 향보다는 남들의 시선과 어떠한 잣대로도 잴 수 없는 자신만의 향을 찾게 해 주는 것을 원했다.


유명 향수 브랜드는 생각보다 진취적이고 역시나 유명하다 보니 구매자들이 어떠한 향을 원하는지 데이터기반으로 잘 팔릴 수밖에 없는 향과 스토리를 엮어 판매하였고 덕분에 공방에 앉아 원료를 만지고 새로운 향수를 만드는 일보다는 선반의 먼지제거를 하는 일이 더 많았다.


비가 많이 오는 날 나는 홀에 있는 조명 몇 개를 꺼버리곤 가게 문 앞 흔들의자에 앉아 비안개를 보았고 따뜻한 백차를 한잔 들고 와 잔받침대에는 시나몬원료와 바나나원료 한 방울을 떨궈두었다.


나는 주로 밋밋하고 향이 강하지 않은 차들을 좋아하는데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향을 입히기 위해서다. 잔 바닥과 잔받침대 사이 원형의 공간에 향료를 한 방울 떨구거나 향수를 뿌리면 그 향을 마시는 느낌이 나서 좋다.


역시나 오늘도 적적하게 하루가 지나가는 듯하여 고개를 뒤로 젖혀 잠시 눈을 감았다.


작게 땅바닥에 우산을 쳐 빗물을 떨궈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앞으로 튀어나오다가 흔들의자의 반동으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지만 다행히도 늘 없던 손님에 잘못들은 것 일지도 모른다는 내면의 심리가 있어 그렇게 힘 있게 튀어나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세 번 정도 바닥에 빗물을 털고는 창문에 맺힌 물방울에 둘러쌓인 실루엣을 가진 손님은 깔끔하게 우산을 접고 난 후에야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19세기 후반의 뉴스보이를 연상시키는 옷차림을 하고는 깔끔하고 간략하게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진열대 앞으로 직행하여 구경을 하는 듯했다.


오후 5시가 막 넘어간 시간이었지만 먹구름과 그의 옷차림 덕분에 이곳이 영국에 있는 향수공방 분위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찻잔을 서둘러 정리하고는 그의 옆으로 갔다.


내가 옆으로 가자마자 그는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적당한 음역대를 가진 목소리로 새로운 향수를 만들고 싶다며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말했고 나는 뭐에 홀린 건지 분위기가 꽤나 맘에 든 건지 모르겠지만 살짝 미소를 띤 후에 하얀 테이블 위에 갈색린넨을 깔고 향료선반들을 천천히 가져갔다.


생각하건대 분명 처음 향수를 만들어 보는 사람은 아닐 것이다. 향료가 들어 있는 수납함을 다 앞에 놓이기도 전에 이미 몇 가지 향료를 꺼내 앞에 놓아두었고 수납함을 다 나른 후 그의 앞에 앉아 어떠한 향수를 만들고 싶냐고 묻자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전 후각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좋아했던 향들로 향수를 만들고 싶은데 어렵겠죠?'


첫인상에 대한 편견이 한 문장으로 깨진 순간의 표정은 어쩔 수 없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다시 돌아와 잠깐의 생각에 빠졌다.


그 찰나의 순간의 생각은 나 스스로 오지 말아야 할 사람을 구획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더욱이나 세심한 그는 순간의 내 표정을 잡아채고는 실례가 많았다고 돌아간다는 걸 양손으로 손사래 치며 겨우 앉히곤 그의 앞에 놓인 향료들을 내 쪽으로 가져와 향수를 만들 준비를 했다.


'유자, 장미, 다크앰버, 오렌지, 샌달우드, 은방울꽃, 라벤더' 그가 고른 향료들은 대부분 플로럴 했지만 그는 조금 묵직한 향을 원했고 사실 내가 생각하는 그의 생각 또한 그랬다.


이미 고른 향료들로도 어느 정도 조합이 가능하기는 하지만 무게감 있는 향료들을 몇 개 더 꺼내 보여준 후 최종적으로 추가된 건 '화이트머스크, 페퍼, 시나몬' 이였다.


그렇게 그는 새장처럼 생긴 향수병을 보며 그 앞에 놓인 비커에 임의대로 향료를 집어넣으며 고심에 빠져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어떠한 조언도 어떠한 내용의 설명도 필요가 없었으며 자신의 향을 만들어 내는 그를 보며 옆에서 다 쓴 향료들을 정리하는 것 그것 외에는 그의 행위 자체에 손을 올릴 수 없었다.


그렇게 비커에 향료들과 에탄올, 정제수까지 다 넣고는 나에게 환한 미소를 보이며 끝이 났으니 향을 맡아 봐 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향을 맡기도 전에 알아채긴 했지만 그는 꽤나 재능 있는 감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역시나 시향지에 얹어 맡았을 때에도 향들의 조화가 좋다거나 어떤 브랜드가 떠오른다기보다는 그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렇게 그는 값을 지불하고 나갈 때에도 멋진 목소리로 인사를 하곤 초저녁의 빗속으로 사라졌다.


그다음 날 나는 진열되어 있던 향수를 모조리 버렸다. 가지고 있던 레시피도 나의 상식선에서 가지고 있던 머릿속에 있는 향료의 배합표도 잊어버렸다.


그리곤 찾아오는 이에게 향료의 이름이나 설명대신에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나 오늘 점심메뉴, 가장 보고 싶은 것 등을 물어보았고 기억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어키는 향수를 만들었다.


가격표나 이름은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그대신 오는 이들에게 이 공간이 전하는 바를 적어 보여주었다.


기억은 향기로 그 향기는 문장으로


나는 다시 그 문장을 향기로


향기는 유리 새장 안으로


그들의 손목 위 새장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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