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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Jun 23. 2023

다용도 유리잔

세척 시 파손주의



비어있는 잔에는 어떠한 것이든지 부을  있었다.


오렌지 주스가 가득 차고 그게 비워질  즈음 오렌지주스 자국이 남아 설거지를 해야 했고, 생크림이 부어졌을 때에는 유지방덕에 지우기가 힘들었지만 어찌 되었든 결국 깔끔히 마무리했다.


나는 비어있는 유리잔이며 누군가가 사라지면 자국이남아 그 자국을 열심히 지워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국은 얼룩지고 냄새가 나며 결국엔 상해 유리잔은 더 이상 유리잔이 아닌 재활용 쓰레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국을 뽀득뽀득 씻어 다시 새 잔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최선의 방법인 망각성분이 가득 찬 세제를 선택하였고 무색무취의 세제는 어떠한 것이 담겼는지 조차 모르게 깨끗이 나를 비워주었다.


언제나 기억을 소거할 수는 없기에 나는 그저 손때 묻은 와인잔을 세월이 깃든 멋들어진 빈티지라고 칭하였고, 궤변인 걸 알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손자국 정도는 괜찮고 생각했다. 빛에 비치지 않는 어두운 부분곳에 자리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에 그렇다.


굳이 잔에 자국이 묻어있는지 전등에 하늘에 비춰보지 않아야 한다. 비칠 때 보일 수많은 손자국과 여러 가지 음료들이, 혹시라도 남긴 흔적들이 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게 할 수 있기에 더러운 자국이 거뭇한 때가 되어 그림자가 질 때면 나도 그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기에 잔은 항상 어두컴컴한 주방천장 중간선반에 넣는다.




기억이라는 부분에 있어 재능이 있다고 자부하는 나는 기억하는 것도 기억을 지우는 일조차도 잘하는 편이었다. 어떠한 것을 또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에는 적당한 이해가 필요한데 나는 이해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기억을 잘하는 편이었고 그 외에 이해가 가지 않으면 머릿속에 남지 않아 어려웠다.


하지만 기억을 지우는 일은 조건 없이 그저 지워버리곤 했는데 나는 이 행위를 기억설거지라고 칭했다.


나는 설거지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요리를 할 때에도 요리 중간에 바로 설거지를 해서 음식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이를 초단위로 쪼개 최적화시켜 요리가 끝날 때에는 항상 싱크대는 깨끗하게 비워져있어야 한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 식기를 세척할 때에는 먹었던 음식들의 레시피에 대한 재정립이나 감평정도를 머릿속에서 생각하곤 하는데 혼자 살다 보니 설거지를 오래 할 일은 많이 없었다.


가끔 작은 주물밥솥을 기름먹이거나 주방에 오래 들릴 일이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데 나는 이 적막하고 붕 뜬 시간이 너무 좋다.


기억을 설거지할 때에는 주로 물에 불려두는 편이다. 꽤나 오랫동안 담겨있던 내용물을 지우는 데에는 잠시 불려두는 것이 후에 수월하게 때들과 자국들을 지우는 데에 유리하기도 하고 베이킹소다나 구연산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독한 방법이기에 그저 물에 잠시 담가두는 것이 좋다.


그렇게 잠시 방치하면 뭉쳐있던 기억들 마저 싱크대 안에 넓게 퍼져 잠시동안은 예전의 기억들이 생생히 있었던 것처럼 변하는데 자국들이 물에 번져 예전의 기억들보다는 옅은 색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힘들긴 하다.


전체적으로 고르게 퍼진 기억들을 마지막으로 하고 하수구로 비워내면 몇 군데에 덩어리 진 기억들만 남아있어 설거지를 하기에 편하다. 그리고 그 부분 된 곳들을 보고 꼼꼼히 지워내면서 더 이상 나는 무엇이 담겼던 잔이 아닌 어떤 것이든지 담길 수 있는 내가 된다.


오렌지주스를 마시던 잔을 닦지 않고 자국이 남은 채로 와인을 담는 건 예의가 아니다.


만약 담는다고 하더라도 와인은 오렌지주스잔에 담긴 와인이 되어버릴 뿐이지 와인잔에 담긴 와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 와인은 오래 담기면 담길수록 상하고 맛이 변질되어 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망각은 세제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닌 수많은 내용물이 담기고 버려지는 반복에도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가 원래의 나를 찾는 것이다.


잔의 역사를 기록할 필요는 없다. 어떠한 것이 담겼을 것이고 다시 담길 수 있는 단단한 잔 인 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건강한 망각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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