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조각들의 아름다움
새 하얀 캔버스 위에 스케치를 하며 결국은 그리고 쓰고자 하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를 때까지의 과정 중에 나온 부산물들을 습작이라 한다.
과연 '습작은 부산물에 지나치지 않는 것일까' 혹은 '그 결론의 양분이 되고 햇빛을 더 잘 받게 해 주는 잎사귀정도로 치부할 수 있을까'
통과의례처럼 본인의 기준으로 훌륭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준비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시합이나 시험 등의 정답이 명확하게 구분 지어진 학문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준비과정마저 미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대부분 어떤 것에 대한 스케치 또는 습작 정도의 이름을 붙여 전시회장에 작게 부착되거나 일련의 스토리텔링을 하기 위해 전시방향의 서두에 두는 편이다.
최근에 습작만 잔뜩 붙여둔 전시회를 보고 식전빵만 내놓는 뷔페 같은 느낌이 들어 아쉬워하는 건 아니다.
많은 습작들을 보고 결론을 본 소감은 '꽤나 다른 작품이 나왔다'였고 하나의 피사체를 그리기 위해 여러 가지 구도와 방식들을 달리 한 전의 과정들을 보고는 단순히 스케치나 습작이 아닌 영감을 찾기 위한 영수증 같다고 생각했다.
완성하기에 좋지 않은 구도와 좋은 구도를 찾아 최선의 방식으로 결과를 내는 것 하지만 내가 간직하고 있는 예술은 나의 생각과 의견보다는 읽고 보는 사람들의 자유도를 최대로 높여 나의 의견은 깔끔히 무시해 주길 바라는 것 이 두 가지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긴 하지만 그대로 아름다우니 존중하기로 했다.
과정론자인가 결과론자인가라고 따진다면 나는 무조건 결과론자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관계, 사회, 예술을 분리하는 듯싶은데 아마 세 가지 정도의 큰 구역에서 예술만이 과정론자일 것이다.
아마 관대함에서 나오는 편협하고 치사한 논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까지 끄적거린 수많은 것들이 습작이 아닌 하나하나 빛나기를 원하기에 과정조차 의미를 부여하는 자기 방어적인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객관화가 잘 되었다는 건 꽤나 중요하다. 진정으로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알기 위해 또는 감정낭비가 하기 싫어 감정을 숨겨두지 않기 위해 정확히는 회피하지 않기 위해 객관화는 필요하다.
만약 내가 유명해져 내 습작들을 누군가가 볼 때 내 다음의 완성본을 기다리는 것이 아닌 나의 습작 하나하나에도 무언가를 느꼈으면 좋겠다. 미완성의 작품을 보고 감정을 느끼는 것은 무례한 말이지만 그랬으면 좋겠다.
사실 미완성도 아니고 완성도 아닌 암시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크다. 예를 들어 공작새를 그린다고 할 때 나는 화려한 깃털과 다채로운 색상이 아닌 공작새 앞의 철창을 먼저 그린다.
어떠한 철창으로 가두어야 그 새가 더욱더 고혹적이고 자세히 보고 싶을지에 대해 고민한다. 철창은 공작새의 날개에 맞춰 어느 정도 방사선을 덧대어야 할 테고 반짝이고 정형화된 철창보다는 화려한 깃털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목탄으로 찍어 누른 듯한 건조하고 거친 느낌이 좋을 것 같다.
그림에 한해서지만 나의 습작의 제작과정은 이러하다. 비록 나만이 그러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또는 그 누구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루어가는 과정 중에 버릴 것은 없다.
다만 내가 그걸 습작이라 칭한다면 나 또한 이룬 것이 없기에 무엇하나 걸어두지 못하고 텅 빈 미술관에 언젠가 걸릴 나의 아름다운 작품 하나를 걸고자 벽 앞 바닥에서 열심히 붓과 연필로 휘갈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벽에다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자 한다. 언젠가 벽에 걸릴 추상적인 어떠한 것을 쫒는 미치광이가 되기는 싫다.
그럴 바에 나는 우아하고 건방지게 사소한 것 하나까지 벽에 걸곤 나중에 더 나은 그림이 있다면 가장 맘에 드는 큰 공간에 걸어두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