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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own Jun 05. 2023

수동식 잠금장치

익숙하지만 난폭한 것들이 날 갉아먹을 때 필요한



이따금 방이 나다분해지는 일이 종종 있을 때마다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며 찬찬히 어떠한 부분이 언제 어떻게 망가졌는지를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그 기억의 최초는 결국 나를 타고 들어와 가지런하고 정갈했던 나의 방마저 부숴버렸고 나는 흐트러진 물건마다 우악스럽게 담긴 기억을 되새기고 나니 어딘가로 잠겨 숨어버리고 싶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기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년 크리스마스는 아마 최악이 아닐까 싶다. 연애에 대해서 무지하지도 그렇다고 능숙하지도 않은 적당한 연애를 하며 지냈던 시기 그 당시 연인은 대학원에 진학하여 만날 시간조차 없었고 한 달에 한 번 30분 정도를 집에 같이 가는 버스 안에서의 마주침으로 만족하던 나는 놀랍게도 크리스마스에 헤어졌다.


이유를 듣고 싶지도 않았고 당시 마지막까지 나에게 배려란 한 스푼도 없었다는 사실에 전날 이브부터 정성스레 끓여 만든 스튜와 냉장고에 가득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식재료들 무슨 와인을 좋아할까 하며 골라온 와인까지 아마 새해가 지나 그 사람과 나를 위한 식재료에 곰팡이가 슬고 나 또한 그것과 다를 바가 없어질 때 즈음에 정신을 차렸다.


그동안 썩어 문드러진 마음과 같이 옛 기억조차 같이 땅에 묻어 영원히 돌려보냈기에 어려움, 힘듦은 고사하고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나지도 않았다.


혹여나 목소리가 기억이 날까 이름 중 한 글자라도 떠오를까 확실히 박멸해 더 이상 나를 좀먹게 하지 못하게 했다.


여럿보단 혼자가, 낮보다는 밤이, 화목보다는 고요함을 애정하던 나는 혼자 사색할 시간이 많았다. 나는 이걸 이제 와서 혼자 청승 이라는 걸 알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색하는 것이 아닌 그저 그 무언가에 잠겨 멍하니 바라보거나 정처 없이 걸어 다니는 한량 정도의 불과한 행위였고 그 종착지는 항상 욕조가 있는 호텔에서 쇄골 언저리까지 가득 물을 채우고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자욱한 수증기의 요동침을 바라보며 맥주를 몇 캔 들이붓고는 그대로 아랫입술까지 잠가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난 지도 모른 채 눈만 끔뻑이다 일어나 움푹 패인 침대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기절하는 것이 잠시나마 생각도 하기 싫은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임과 동시에 재충전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행복만을 추구하고 모든 것에 행복의 의미를 둘 수 없어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아름답게 꾸며주지만 발이 아픈 구두, 오늘따라 화창하게 빛나는 눈 아픈 아침, 향을 사랑한 나머지 집 앞 마트에서 당근 따위를 사는 데에도 향수를 뿌려야 하는 나, 여러 번의 데임에도 불신 가득한 마음으로 또다시 시도해 보는 인간관계의 반복과 어딘가 말할 곳이 없어 비루한 글로나마 갈증을 해소하지만 당최 대답을 주지 않는 소설 속 주인공의 다음 행동까지 나를 좀먹는 것들은 크지 않았고 너무나도 있어야 할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아니고서야 다음의 어떠한 일을 할 수 없었으며 나는 여지없이 나의 에너지를 갉아먹어 그것으로 살아가고 또 어딘가로 잠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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