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게임 애호가
체스보단 부루마블인 것에 대해
누군가의 목소리를 닮고 싶어 열심히 성대모사를 했던 나는 어느샌가 그의 생각과 태도 행동마저도 닮아가 어느새 당참과 무례함의 그 애매한 회색의 콘크리트바닥 사잇골목에서 흰색 태도와 검은색 기분의 병정들을 체스판 위에 두고 상대방과 아슬아슬한 게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잘못됨을 알게 된 건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방이 모든 말을 나에게 빼앗기고 떠난 뒤 내 주위에 둘러진 거짓된 기분과 태도들이 그늘이 지고 아무도 찾지 않는 밤이 되자 모든 것이 검은색으로 물든 걸 인정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항상 고정적인 생각이 몇 가지 있다. 행동에 대해서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급한 모습을 보이지 말자' 근래 들어는 '솔직해지자'가 있지만 개발 중에 있어서 난항을 겪고 있어 잠시 접어두도록 하자 성격이 유해서그런 건 아니지만 항상 느긋하고 곡선적인 움직임을 추구했던 나는 결국 친구들에게 '귀족고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고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떠한 행동들이 남들이 보기에 겉멋이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 는 김수현작가님의 말대로 '기분을 다스려야 나를 다스릴 수 있다'라는 베이스의 내용인데 나는 사실 상대방에게 이 말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를 들자면 상대방이 나와 만나기 전에 어디선가 기분이 나빠져와서는 나에게 괜히 화풀이하는 경우가 더러 있어 이럴 때마다 사용했던 말이기도 하다.
물론 공감을 해주고 어디서 누가 그랬냐며 같이 화를 내줄 수도 있지만 그건 나의 배려이지 필수는 아니라 생각하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은 대게 이미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 버린 지 오래다.
학창 시절 나는 매우 예민함의 결정체였고 사회성도 많이 없었다. 그래도 학창 시절 유일한 친구이자 일름보는 고맙게도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해 주었다. 이해라기보다는 일종의 구제 정도였을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면 나는 학교는 공부를 하러 가는 곳이기에 환영회, mt, 술자리 등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하는 편이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열의만큼은 넘쳤다. 교수님 퇴근시간 때 찾아가서 질문세례로 퇴근시간늦추기, 리서치 해오라고 했더니 논문제출하기, 수채화수업에 유화 그리기 등 상식선의 대학생활의 범주를 넘겨버린 나는 교수님들의 믿음과 불편함을 동시에 얻어간 특이한 포지션으로 대학생활을 이어갔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하려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이성적인 판단과 사고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고작 대학생활에 쓰려고 했던 말은 아니지만 저 위의 특이행동을 실현하기에는 꽤나 많은 시간과 영감이 필요했고 누군가와 놀거나 친해지기에는 나름대로 즐기고 있는 대학생활이 아까웠다. 그렇다고 학과애들이랑 친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고 모두들과 장난도 치고 수다도 떨었는데 방과 후 에는 집으로 도망치느라 같이 놀지는 않았다.
나는 기분이 나쁘거나 언짢으면 표정에 다 나타나는 편인데 그때 당시 내 표정에 먹구름이 껴있으면 알아서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주었다. 지금 와서는 정말 인성파탄 그 자체였다고 생각하는데 하필이면 조별과제가 끼어있는 주에 어떤 이가 직무를 내던져 장장 3시간 동안이나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칼 던지기 논쟁을 하곤 그날 밤 술에 취한 그에게 전화가 와서 엄마에게 일렀다는 통보와 함께 내 친구는 일름보가 되었다.
그 시절의 과오를 인정하고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개선된 나지만 아직도 전화의 첫마디와 끝마디는 죄송합니다로 시작하기는 한다.
사실 오늘도 회사에서 1년 만에 상사에게 크게 꾸짖음을 듣곤 어질어질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었지만 다행히 누군가가 오늘 따뜻함 치사량을 넘기게 해 준 덕에 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체스는 이제 그만두려고 한다.
기분과 태도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삶의 방향이나 모든 것을 예상하고 상정하는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었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이 비바람 치고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모르는 상황 속에서 혼자 고요하고 우아하게 체스말이나 옮기고 있다면 그건 체스말이 5kg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건 고집이고 아집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아직 게임에 대한 미련은 못 버려서 부루마블 정도로 전환해 보려고 생각 중에 있다.
그 지긋지긋한 흑과 백도 없거니와 6x6의 변수와 곳곳에 있는 황금열쇠 가끔 혼자 동떨어진 무인도와 가끔의 일탈을 위해 들린 콩코드 여객기 정도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파란색 대리석이라니 멋지기도 하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