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가족들과 놀러 갔던 곳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소록도'였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때 엄마 차였던 다마스를 배에 올려 섬 안으로 들어가 섬 안을 둘러보고 해변가에 정착해 아무도 없는 해변가를 내 집 앞마당인 양 신나게 놀았던 기억이 있다. 조금 크고 나서야 그 '소록도'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됐고 내가 거기서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그 섬에 이주됐던 한센병 환자들을 함께 떠올리게 됐다.
수도권에도 거주하지 않고 완전 지방에 거주하는 내가 이번 주 수도권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장애인들의 시위 기사와 그 시위로 인한 피해를 본 사람들의 각종 커뮤니티 글을 보면서 이동할 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장애, 비장애를 가리지 않고 알게 됐다고 생각했지만. 일부 언론이 선동해서 만들어지는 여론은 여전히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주장하며 억지 주장을 하는 장애인들을 대역죄인이라도 되는 듯 말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보며 환멸을 느낀다.
특정 누군가, 특정 집단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사회의 편의는 실제로 희생으로 배제된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편의라는 걸 우리는 사실 알고 있다.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줘야 하고, 휠체어 바퀴가 승강장과 열차 사이에 끼이는 것을 막을 방법을 찾아야 하고 시행하는 저상버스가 사실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버스라는 걸. 아직도 모른다면 이제는 이건 본인의 정치적 이념을 떠나 윤리적으로 배워야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당연한 소양 아닐까. 이런 기본적인 것을 바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기대고 그런 기대가 너무 커서 짜증과 분노도 그만큼 커지는 것인지 알 순 없지만 말이다.
한센병 환자들이 떠오르지만 여전히 내게 소록도는 가장 아름다운 섬이고, 엄마와 동생들 그리고 이모와 외할머니까지. 다마스 안에 다 꾸깃꾸깃 몸을 넣고 탔던 그 순간들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잊는 것보다 그들을 같이 기억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사회 구성원이 되자고도 생각했다.
이동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곧 생계의 문제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이걸 사회생활로 범위를 둔다면 친구를 만나는 것부터 시작해 여러수십 가지 이유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그걸 하나 마음 놓고 타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스스로 장애인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는 걸 왜 알아주지 않는 것인지.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 힘든 투쟁을 이어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앞으로도 존재하게 될 수많은 장애인들을 대변해 스스로를 욕받이로 희생하며 힘겨운 투쟁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당연한 권리 주장을 지금까지 지켜지지 않아 차별하지 않게 요청하는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하는 현실도 고달프지만, 긴 계단 앞에서 휠체어를 두고 서 있을 장애인들만 할까. 미관상의 이유로 치워버린 점자블록 끝에서 방향을 잃은 장애인들만 할까. 이건 배려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존중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공평하게 누려야 하는 공공시설 확충의 문제고. 이걸 예산 아깝다고 떠들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꼴에 당대표라는 인간이 말하면. 대체 무슨 표정을 지으며 기사를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정신 차리라는 말도, 부디 너와 너를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겪지 않길 바란단 말도 못 하겠다. 그건 진심 아니니까. 온 마음 다해 불행을 바라진 않지만 또 뭐 온 마음 다해서 행복하길 바랄 사이도 아니니까.
사회가 더는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되찾아 달라 울부짖는 이들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는 사람을 보고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거나, 우는 그들을 대변해 대신 싸워줄 수 있거나. 이미 망한 거 같지만. 부디 당선인도, 그들 아래 참모진도. 어쭙잖은 그들의 당대표도 하루아침 벼락이라도 맞아 그런 사람으로 변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