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정은 Jul 03. 2020

작은 시선들의 결정체

『시선으로부터』 서평

"그러나 말이란 건 그렇습니다. 일관성이 없어요.
앞뒤가 안 맞고, 그때의 기분 따라 흥, 또 다른 날에는 칫, 그런 것이니까
그저 고고하게 말없이 지낼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도 합니다."
『시선으로부터,』 p.325



그렇다. 말이라는 건 갔다 붙이기 나름이며 기분따라 상황따라 바뀌기 마련이다. 내가 방금 한 말을 속단할 수 없고 영원할 것이라 단정할 수도 정의할 수 없음은 사전을 만드는 이가 그 누구보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그럴듯한 말도 내일이면 고쳐야 할 부분이 보이고 잘못됐다고 여겼던 말에도 쓸모 있는 단어를 분명 하나는 건질 수 있다. 어떤 날에는 그 말을 무시하며 넘겼다가도 다음 날에는 그 말을 꼭 봐야만 잠에 들 것 같은 요란한 날들의 연속이다. 심리학에서는 나를 정의하려고 하는 속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얘기한다. '최근 한 달 동안의 감정과 생각이 비슷한 부분에 체크하세요.'라고. 사람의 기분은, 생각은, 말은 그러니까 계속 바뀐다. 이것은 곧 나의 시선이 되는데, 시선은 나로부터 나, 나로부터 타인에게 흐른다.


그러나 '시선'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면 그리 달갑지 않다.

시선이라는 건 타인으로부터의 나에게 더 많은 감정과 시간과 노력을 할애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로 향하는 시선이라는 것은 어쩌면 주관적이라고 착각하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만들어졌을지 모른다.      



들어가기에 앞서)

지금부터는 『시선으로부터,』의 구성이나 내용에 대한 얘기는 크게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해왔던 서평도, 그 구성도 이번 작품만은 다르게 써보려고 한다. 오히려 한 문구에 대화를 하는 형식, 그러니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나눠보는 방식을 택하기로 한다(비교적 근래에 나온 장편 소설이니 내용을 언급하는 건 크나큰 스포가 될 거라 여긴다) 서평을 쓰는 사람이지만 글을 쓰는 입장이기도 하니 책을 읽고 서평을 보며 ‘이런 사람도 있구나. 너는 빻았어!’라고 대화하기를 원한다.


이번 작품은 장편이지만 한 달을 들여서라도 3번은 더 넉넉히 읽고 싶은 마음이다. 이번 작품에 이토록 뜸을 들이는 것은 오랜만에 쓰는 서평이기도 하지만 서점에서 서평을 쓸 책을 고르는 데까지 '시선'이 먼저 닿았기 때문이다. 이 시선도 누군가로부터 만들어졌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닿았으니 그 연을 써보려고 한다. 어쩌면 침착하지 못하고 화를 낼 거고 어쩌면 서평을 쓰고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차분해질지 모르겠다. 아무쪼록 정세랑 작가와의 소설, 을 통해 개인의 시선을 잘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란다.               



            "아무도 그런 거 안 따질 거야."

                                     (p.29)


표지)

"그 지점에서 우윤의 의견은 지수와 갈렸다. 우윤은 할머니가 행복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가진 조각들이 다르네, 할머니가 나눠준 조각들이 다른가 보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하지 않았다."                                                                                                                                                                       

                                                                             p.13


'조각, 이 책에서 ‘믿음’ 다음으로 임팩트 있는 단어이다. ‘어쩌면 정겹다고 느꼈던 ‘뿌리’, ‘줄기’, ‘잎’도 고리타분한 단어가 된 걸지도 모른다. ‘조각’, 책의 표지를 보다시피 결정의 산물이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사실 오랜 기다림에 차곡차곡 쌓인 결정을 책의 시작, '가계도'에서의 한 집으로 얘기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물음표를 던져본다. ‘조각’, 그것의 모임에 대한 생각을 ‘결정’으로 떠올리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에선 쉽지 않으면서도 꿈꾸고 있을 이뤄지지 않은 일이다.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힘 있고 고집 있는 나무가 아닌 '결정'이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분명,        


"선생 생각이랑 내 생각이랑 어느 쪽이 더 오래갈 생각인지는 나중 사람들이 판단하겠지요."                                                                                                                                                                  

                                                                            p.10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이자 어조는 '믿어'이다. 환상적인 곳을 데려가 주겠다고, 이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니라고, 이 피자가 가장 맛있다고, 항상 끝에는 '믿어'가 있었다. 시선의 말끝에는 미래 세대에 대한 소망과 자신의 말에 대한 확신이 '믿음'으로 작용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조금 더 용기 내 이 책을 마저 읽어보기로 했다. 흐릿한 캐릭터의 방황은 의심을 불러오지만 단호한 한마디를 소리 낼 줄 아는 캐릭터는 오늘을 정확히 짚었으니.   



"형식만 남고 마음이 사라지면 고생일 뿐입니다. 그것도 순전 여자들만. 우리 큰딸에게 나 죽고 절대 제사 지낼 생각일랑 말라고 해놨습니다."

                                                                              p.9                                                                                                                                                                    


이 글이 나왔을 때 가장 큰 이슈는 이 부분이었을지도 모른다. 제사는 전통을 강요하면서 처음의 뜻과는 멀어진 마음에 먹물을 부은 격이다. 누군가 고생을 한다는 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마음 불편한 정도가 클 텐데, ‘제사’라는 형식이 마음과 몸을 갈기갈기 찢는다. 누군가를 쥐어 파고 있다. ‘시선’은 이곳에서부터 다른 시선을 제공한다. 이건 과연 누굴 위한 행사치레냐고.    



", 늘 소문과 분쟁에 휩싸여 사셨으니 그런 면이야 가족으로선 신경 쓰였지만...... 편애가 없어서 편했어. 아들에 대해서나 딸에 대해서나, 자기 자식에 대해서나 데려온 자식에 대해서나."                                              

                                                                              p.22

"''가 들어가는 단어는 사실 묶어서 싫어했다."                                                                                                                                                                           

                                                                              p.67


여기서 완전히 ‘예’와 자신의 일상을 분리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예’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에 잘못 자리 잡은 유교라는 사상은 개인을 묶고, 집단에 이미지를 씌웠다. ‘예’의 좋은 점이 있겠으나 어떻게든 꼬아서 ‘예()’의 예(例) 안에 개인을 ‘우리’ 안으로 끼워 넣어진 적 없었는지 생각해본다면 바로 숱하게 카드 뉴스를 만들어 낸다. 그것이 누군가의 시선으로 발휘해 자신을 움츠려 들게 하지는 않았는지 분명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며느리가 아니라 아들이 회사로 돌아간 것에 분노를 느끼며 핏대를 높이는 사람, 시선처럼. 시선, 그는 누구인가.     



"갓 돌 지난 아기 때문에 장례식장에 오래 못 있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의붓딸이라 자리를 자꾸 비운다고 했겠지."

"아이고, 그런 소리 하는 사람들이 못 된 거야. 너는 누가 뭐라 해도 우리 동생이지. 내가 너랑 명은이 다르게 생각 안 하는 거 알지?"                                                                                                                                      

                                                                           -p.44


아직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한 여름초였고 이제 막 의자에 40분쯤 앉아 있는 게 익숙해지던쯤, 배워야 했던 '사회'는 이제 '슬기로운 생활'이나 '바른생활'이 아니었다. '사회'는 더 이상 친구와의 관계가 아니라 가족을 가르쳤고 사회와 아니, '표준'이라는 개념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표준'은 '대부분', '정상', '보통', '평균', '규범' 등의 말로 대체되기도 하며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지금 보면 그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가족 구성원도 일부분이지만 그들은 저 어휘로 하여금 대부분이고 정상적이라고 말하고 바라보게끔 만들었다. 그리고는 선을 긋듯 오른쪽 페이지로 넘어가면 실선으로 된 블록 안에 '예외', '더 알아보기'라는 말 풍선을 넣고 '이혼 가정', '입양 가정', '한부모 가정', '다문화 가정'의 키워드를 크게 띄워놓고 그 밑 문장은 물론, 선생님의 입 속에서조차 "이런 집 친구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네. 잘해줘야 돼요." 얼토당토않는 자문자답은 인식이라고는 주입식 교육에 의한 것 밖에 없던 그 시절 학생들이 서로를 편 가르기 하고 째려보거나 '어떠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금에서 돌이켜 본다면 그런 식의 교육이 한 아이를 움츠러들게 만들고 되지도 않는 '너는 약자야'라는 시선과 혀를 차고 불쌍하다고 여기는 시선과 행동을 사회에서 멋대로 지정한 표준에 들면서도 인성 빻은 놈들을 만들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의 교육과정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지만 예전의 교과서와 교과 과정을 만든 교육부와 학자들을 찾아가 "너네가 뭔데 사람을 표준 안에 넣었다 말았다 해! 표준이 뭔데!! $&*(%%$^야! "라고 하며 말을 해야 하는데. 후,



"그런 시대였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고요."                                                                           

                                                                              p.25


그런 시대, 지금, 다르지만 다르지 않고, 변했지만 변하지 않았다. 여기서 ‘,’은 ‘=’이자 ‘≒’이다. 어떤 면은 나아졌다고들 하나, 그것은 나아진 것이 아니라 감추지 못해 사라지는 것을 택한 것이고 다른 이름으로 다시 돋아나 싹을 틔우면 트랙터를 몰고 와 밭을 갈아엎는 방식이었다. 그것은 회사든, 세상이든, 가족이든, 개인이든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그들의 시선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시선, 그것을 ‘한계’라고 하는데 자의란 없고 타인이 정해놓은 결승선을 넘어야 하는데, 절대로 서있는 위치가 같을 리 없으며 장애물도 적절한 시련도 코스 중 뿌려져 있다.       


온갖 능력이 있어도 뜻을 펼칠 수가 없다는 것도 자격증 따는 걸 멈춘 이유 중 하나였다. 물론 그 자격증도 무의미하고 영양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평행에 곡선 하나 긋지 못할 행위에 나를 초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작가로서, 서평가로서 이 일을 한다는 것 자체에 씌일 프레임은 견딜 수 있었으나 여성 작가라는 것에 들릴 말들에 대해서는 두 팔을 휘두르며 달려갈 정도로 기겁할 마음의 준비를 심상치 않게 하고 있었다. 달라지지 않음은 나에게 반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착각에라도 빠져 그러한 정황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었으나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사실'이었으므로 세상을 직시해야 했다.



", 당신은 괜찮은 벽이야. 내가 생각을 던지면 재밌게 튀어 돌아와."                                                                                                                          

                                                                           p.237


관계에서 상대와 나를 비유하는 많은 단어를 떠올려봤지만 감정이 우선이 아닌 생각과 말(반응)에 관한 어휘는 몇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벽은 기댈 수 있는 곳이자 의존하는 곳으로만 여겼던 편협한 생각을 넓게 만들어준다. 이런 생각들이 하나 둘 모이다 보면 간혹 나의 생각과 말이 과거에 머물러 있다거나 고지식하다고 느껴져 쓰라리다. 나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부터 정처에 머물러 있는지 한참을 생각하다 이럴 시간에 빨리 다음 문구를 읽고 사고를 일깨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눈을 문구에 고정시킨다.


  



                                                                                     

                                 <책의 문장>

     (※ 책을 지 않으면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뇨, 전 그런 욕구는 없는데요." (p.23)

"자신이 사는 곳을, 속한 곳을 한 번이라도 낙원이라고 불러본 적이 있던가? 너무나 생소한 태도였다."(p.128)

"화산의 부산물을 놓여 있던 자리에서 옮기거나 섬 밖으로 유출하면 펠레의 분노와 저주를 받는다는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존중하기 위해 곱씹던 명은이었다."(p.199)

"무서워서 못해.... 어쨌든 하와이를 좋아하면 하와이에 오면 안 되는 거였어. 제주도를 아끼면 제주도에 덜 가야 하는 것처럼. 오기 전엔 몰랐잖아. 와야 알 수 있는 것들인데."(p.235)

"크니까 멀리서 찍어야 하고 멀리서 찍으니까 흐리게 나오는 거야. 작은 무지개라도 된다면 내가 알려줄게."(p.284)    

"없으면 없는 거지." "시간 낭비한 거잖아." "시간 낭비 좀 할 수 있지."(p.285)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안 하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p.289)      

"그리고 그 시대 여자들은 다른 여자가 귀엽다 싶으면 김치를 보냈다고."(p.319)     

"공기가 따가워서 낳지 못하는 거야. 자기가 당했던 일을 자기 자식이 당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가 없어서. 혼자서는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한국은 공기가 따가워요."(p.322)     

"너는....... 그래, 쾌락주의자만이 시대를 이길 수 있지."(p.323)     

 



"다른 삶을 원하는 얼굴, 자기 삶을 계획하는 얼굴, 가진 것 없이 비극에서 시작해도 뭔가를 이루고 말 얼굴이었다. 턱을 청록색 퍼 워머에 묻고 먼 탈출에 눈을 던진 채였다."                       

                                                                           p.327


삶이 끝난 순간까지 ‘나’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마음으로 들려온다. 조용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세상의 소리에 조용히 잠들 수 없다. 시선이 긍정적인 시너지를 일으킬 때도 있지만 아직은 하나의 시선이 누군가로 향하는 독화살인 경우가 크다. 그러나 ‘시선’의 따가운 시선은 달랐다. 하나의 고정관념에 대한 투쟁이었으며 오늘이 오기까지의 자유 표현이었다. 그를 향한 시선에 수치를 표하자면 긍정과 부정 중 어떤 것이 더 높을까. 시선은 바란다. 자신의 시선이 먼 훗날, 아니 당장의 난정처럼 자신에게 쓴소리를 해 줄 시대가 올 것을.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역시가 역시지.”, “ 그럼 그렇고말고.”

‘시선’이 이곳에 존재한다면 추측하건대 이 말을 가장 싫어했을 것 같다. 오히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작업. 남들이 그렇다고 생각한 것에 ‘그렇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던져보는 사람,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보다 "나는 거기서 이렇게 생각해봤어." 하는 사람이 그와 더 친했을 거라고. ‘시선’의 시선은 지금까지도 나아가고 있다.     


문장이 흐른다. 시간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에 멈춰있는 것으로 정하지만, 이렇듯 아직 서툰 고정관념을 하나씩 깨 봄으로써 일상이 흔들리고 안정적이지 않게 늘 그네를 태운다. 불안하지만 그래서 안정을 갈구하고 예전에 머물러 '쟤네는 왜 저렇게 힘들게 사나' 하고 소파에 누워 티브이 속 그네들을 보고 구시렁대는, 세상에서 가장 그 쉬운 일이 나의 일상이 되지 않게 늘 나를 흔들어야 한다. 나는 이번 삶에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마무리 평)

나는 이 책이 연령대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느 챕터로 가든 내가 관심이 있는 챕터가 있는가 하면 알고 싶었으나 몰랐던 것도. 인지하려고 노력하나 습득되지 않은 것도 전혀 알지 못했던 부분까지 전 연령층을 가리지 않고 사로잡으려 한다. 정세랑 특유의 일상적인 말투와 상큼하면서도 유쾌한 분위기는 '시선'이라는 소재를 다룬 여느 작품들에서 보지 못한 느낌일 것이다. 또, 아마 각 분야에 대한 전공자들을 한 테이블 안에 모아놓고 책을 읽게 한 후 이야기를 나누게 한다면 각기 다른 얘기만을 나누나 끝날 것 같은, 그런 시선들을 모아보고 싶은 결정체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프 온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